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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네 개 알파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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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네 개 알파벳

입력
200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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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6자회담의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미국이 CVID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답답하기만 한 북한 핵 문제 해결에 한 가닥 기대를 걸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CVID는 네 개 영어단어의 첫 알파벳 묶음. C는 완전(complete),V는 검증가능(verifiable),I는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D는 폐기(dismantlement)이다. 우리말로 길게 번역될 수밖에 없는 네 개의 알파벳은 북한 핵에 대해 강경한 미국 입장의 상징이었다. 북한에 대해 백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북한은 용어 자체에 완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국제정치가 미국중심으로 굴러가면서 알파벳 묶음으로 된 신조어들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전의 명분으로 내 세웠다가 존재를 입증하지 못해 홍역을 치르고 있는 WMD(대량살상무기)나 테러의 국제적 확산을 막기 위해 주도하고 있는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등이 좋은 예다. 북한이 이들 신조어의 핵심에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은 그 자체가 WMD이다. 대량살상무기가 퍼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하면 합동작전도 하자는 PSI도 북한과 관계가 깊다. 북한은 PSI가 자신을 압박하기 위한 미국의 획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정부는 미국의 강력한 권유가 있지만 PSI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 미국이 CVID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는 우리의 설득이 주효했다. 우리 정부는 실무회담 때부터 굳이 이 용어에 집착하지 말자는 주장을 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2차 6자회담에서는 한미일 3국이 한목소리로 CVID를 북한에 요구했다. 3차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CVID 용어를 사용하는 한 협상은 진전이 없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미국이 신축성을 보인 것은 북한의 으름장 때문은 아니었지만 상징성은 충분했다.

■ 북한은 미국이 CVID를 말하지 않자 회담장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을 직설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회담장 밖에서 '거리회견'을 통해 일방적 주장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미국과 2시간 넘게 양자회담을 갖고 제의를 경청하는 성의도 보였다. 회담이 끝난 뒤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CVID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긍정 평가 했다. 무익한 회담이라고 혹평했던 1·2차 때와는 달리 "미국의 금후 태도를 지켜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네 개 알파벳의 향방에 민감해야 할 만큼 북한 핵 문제는 복잡 미묘하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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