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은 더 지났으니 오래 전 이야기네. 나 한병태,올해 나이 쉰 여섯.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그때의 석대 얼굴이 지금도 또렷해. "너는 거기 앉도록 해. 저게 네 자리야"하고 전학 첫날 자리를 지정해 줄 때부터 석대는 예사인물이 아니었지. 아니 그전에 물어볼게 있다며 나를 부를 때 그 눈빛, 열 두살짜리들이야 기 죽고 말 도리밖에 없는 변성기의 목소리. 엄석대는 별난 존재였지. 나이 서넛 더 먹어 머리통 하나는 족히 커보이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너의 존재가 피부로 느껴졌어.
드러나지 않는 교활한 권력, 엄석대
중학생들과 싸워서 이길 정도로 특출난 주먹은 타고났다지만, 5학년 2반 교실을 단지 싸움실력만으로 장악하기란 어려운일. 그러면 그의 정체가 뭘까? 무엇때문에 아이들은 그에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고분고분해지는 걸까? 짐작할 수 없었지. 급장이란 명예로운 배지 정도일뿐, 선생님 심부름꾼이라도 해도 좋을 서울 초등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니까.
물론 석대의 그 가공할 권력 뒤에는 절대권력인 담임선생님의 두터운 신임이 자리잡고 있었어. 아이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물건을 뺏고, 심지어 시험답안까지 대신 작성해 내도록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바로 선생님의 믿음이야. 청소검사, 숙제검사, 심지어는 처벌권까지 석대에게 위임하는 선생님의 그 눈먼 신임이 그를 그토록 강력하게 우리 위에 군림하게 한거야.
하지만 그 믿음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아이들은 어떻게 그 믿음에 균열이 가지않을 거라고 믿게 된걸까? 그건 석대가 주먹만 쓸 줄 아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지. 한때 내가 '아량'이라고 생각했지만 적당히 교활하다고 불러도 좋을 재주를 석대는 가지고 있었던거야.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를 구석에 몰아넣기만 해서는 안돼. 석대는 어느 순간 마치 시혜라도 베풀듯 사람을 곤경에서 꺼내 줄 줄 알았어. 시비 거는 아이들을 말려주고, 따돌림 당할 때 놀이에 끼워주는 일만큼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어. 어떤 독재라도 힘으로만 밀어부치면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지.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회유하고 다수의 민중에게 늘 채찍을 준비하고 있지만 때로 당근을 던질 줄 아는 정권은 생명이 긴 법이거든.
누구든 체제에 안주하고 싶은 법
"엄석대가 급장으로 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못돼먹고 거칠기도 하겠지.하지만 그게 바로 이곳의 방식이다.…아이들의 지지란 것이 실상은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야. 나는 어쨌든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석대의 힘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담임선생님만 기성의 체제를 차선(次善)으로 여긴 걸까? 내가 모반(謨叛)을 꾀할 때 일편단심으로 석대를 따랐던 59명의 아이들, 결국 그의 독재 아래 굴복하기를 택한 나 역시 절대권력의 그 교활한 대리인에 안주하기를 원했던 건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서울로 개가한 뒤 조부모 밑에서 커 온 석대, 아이들 위에 군림하며 사뭇 어른 폼까지 나던 그 어린 독재자의 존재가 모두에게 여간한 안심을 준 게 아니었지.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는 한 사람에게 안주했던 게 아니야. 힘과 잔꾀의 전략으로 만들어진 '엄석대 체제'가 편했고, 거기서 벗어날 때 닥칠 곤경이 두려웠던 거지. 그래서 젊은 담임선생님이 새로 온 뒤 벌어진 혁명이 좀 느닷없었던 거야.
나는 석대가 그리운걸까
모래위의 궁궐같은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세일즈로 빛 보겠다고 나섰지만 난 결국 재미를 못 봤어. 간신히 마련한 19평 아파트 팔아 사업에 '올인'했다가 두 칸 전세방에 나앉는 실업자 신세.인생 낙오자. 그래서일까? 꿈에 석대가 나타나, 새로운 담임 선생님에게 모든 비행이 들통 난 뒤 "잘 해봐, 이 새끼들아"는 저주를 남기고 뒷문으로 사라진 바로 그놈.
꿈은 공부의 석차도 싸움의 순위도 석대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이야. 나는 운 좋게 그 반을 찾아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함께 누리는 꿈을 꾸다가 깨지. 그꿈을 마저 꾸지 못한 게 서운할 때도 많아.
그러던 어느날 휴가길 강릉에서 나는 석대를 봤지. 형사에게 수갑 채여 잡혀가는, "그라나다 승용차 뒤좌석에 턱을 제끼고 앉아 간다"는 소문과는 영 딴판인 모습을. 그날 밤 난 왜 그리 서글펐을까? 그가 꿈꾸던 영웅이 아니라서? 모르지. 하여튼 난 괜히 소주 잔을 기울였고, 심지어 그 잔에 눈물 몇방울까지 떨궜어. 나는 석대가 그리운 걸까?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그때 한국일보에는/"권력의 형성·배경묘사 압권"
1987년 8월 19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사. '심사 마지막 단계에서 양귀자씨의 '한계령'과 경합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의 형성과 붕괴를 시니컬한 우의로 절묘하게 묘사한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은 김동리 김윤식 이병주 이어령 이청준이었다.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 '변경'의 한국일보 연재를 앞두고 87년 10월에 이문열씨를 인터뷰한 당시 문학담당 기자인 김훈(소설 '칼의 노래'의 저자)은 "그가 신문연재에 쫓기는 틈을 타 3년만에 쓴 중편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며 "그 소설은 비평가 권영민에 의해 강타 되었다"고 썼다.
■이문열씨 창작배경
소설가 이문열씨가 자신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는 중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87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처음 발표됐고, 92년 박종원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제작상도 받았다.
'권력과 정치'문제를 시골 학교로 옮겨와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최근 이씨가 입을 열었다. 지난 달 22일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호헌을 선언한 1987년 4월 13일부터 28일까지 보름동안 쓴 이 소설이야 말로 문학과 정치가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호헌 선언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싶고 막막해서 쓴 작품"이라며 당시 심경을 밝혔다. 작품의 시간은 4·19혁명 전후지만 창작의 발상은 제5공화국 말기이다.
이씨는 또 "우리사회를 말하기는 해야겠는데 바로 할 수 없으니까 학교라는 우의적 공간을 만든 것"이라며 "첫 담임 선생은 미국을, 두번째 담임 선생은 경직된 이념 같은 것을 상징하며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의인화한 관념들"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내놓은 산문집 '신들메를 고쳐매며'에서도 이 작품을 거론했다. 작가는 소설 속 화자인 한병태에게 편지를 썼다. '1987년 4월 이른바 '호헌선언'이 있던 달 나는 아프게 너를 낳아 세상으로 내보냈다.나를 아프게 하였던 것은 이쪽저쪽에 아울러 얽힌 내 사적인 은원(恩怨)의 사슬이었다.…가당찮게도 나는 그런 너의 성공을 내 세상 읽기가 온당했음을 보증하는 것으로 믿었다. 네가 지녔던 만큼의 비관과 낙관을, 가장 근접하게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는 길로 여겼다. 하지만 나만의 환상이었다.…하지만 내게도 작은 위로는 있다. 그래도 너희 반(班)의 역사를 빌려 우리 역사를 대충은 맞춘 셈이니, 특히 너로 하여금 엄석대가 수갑을 차는 데 박수를 보내게 하지는 않았으니.'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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