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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이슬람 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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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이슬람 하다리

입력
2004.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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콸라룸푸르에서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놀란 적이 있다. 검은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키 큰 여자가 안쪽에 서 있었는데 나는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말레이시아의 무슬림(이슬람 신도) 여자들은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는 정도인데 그는 중동에서 온 여행자인 듯했다.경악하는 나를 보며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단 둘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뒤늦게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두 눈만 내놓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 있는 검은 차도르는 넘지 못할 장막일까.

말레이시아의 ISIS(국제전략문제연구소) 초청으로 11일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는 이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함께 초청받은 14명 중 4명이 무슬림이었다. 예멘 이집트 파키스탄 등에서 온 그들은 '중도 이슬람'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말레이시아는 24년간 장기집권하며 경제발전의 기틀을 잡은 마하티르 전 총리가 물러난 후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고 있다. 원유 주석 팜오일 고무 등 풍부한 천연자원과 전기전자산업으로 1인 당 국민소득 4,000달러(2002년)에 이른 말레이시아는 미래를 향해 달리는 활기찬 나라다.

55개국에 13억 신도를 가진 이슬람 세계는 절대 다수가 전쟁 억압 빈곤 테러 등으로 얼룩져 있다. 그들은 미국이 대표하는 막강한 비이슬람 세계로부터 공격받고 왜곡되고 소외당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암담한 현실에 절망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는 대다수 무슬림들에게 희망을 주는 형제국이다. 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위안받고 있다. 심각한 다민족 갈등을 법과 규칙으로 풀어가며 경제와 정치를 발전시켜 가는 말레이시아의 오늘은 형제국들의 모범이고 자랑이다.

근본주의 이슬람,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으로 낙인찍혀 가는 이슬람 세계의 이미지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평화를 사랑하고 정치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이슬람 세계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을 누가 발휘할 것인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이슬람 하다리'(진보적인 이슬람 운동)의 주도국으로 이집트와 말레이시아를 꼽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마하티르의 뒤를 이어 작년 10월 총리가 된 압둘라 바다위는 선거운동에서 '이슬람 하다리'를 외쳤고, 6월 초엔 아시아·태평양 회담에서 "이슬람의 명예와 고결함을 회복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슬람 국가들의 비민주적인 정부 형태, 압제와 빈곤이 테러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이슬람 국가 중 일부는 계속해서 뒤처질 것이다. 정당한 목적이 '나쁜 무슬림'들의 비정당한 수단에 의해 더럽혀져서는 안된다"고 그는 역설했다.

말레이시아를 둘러 본 11일간의 일정이 끝나는 저녁, 화기애애한 송별파티가 열렸다. 한 사람 한 사람 석별의 인사를 주고 받았다. 마지막으로 예멘의 언론인 하산이 일어났다. 농담을 좋아해 늘 우리를 웃기던 하산의 인사는 이렇게 이어졌다. "말레이시아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그리고 프라이드를 느낀다. 여러 나라의 좋은 친구들과 지낸 지난 11일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오늘 세계에는 행복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행복할 권리가 있다…."

하산은 안경을 벗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떠들며 웃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고통받는 '선한 무슬림'에 대한 연민,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나쁜 무슬림'에 의해 김선일씨가 살해된 충격으로 온 나라가 괴로워하는 나날 속에서 하산이 떠오른다. 그도 울었을 것이다. 증오의 악순환으로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 선한 사람들의 연대로 평화를 이루는, 멀고 힘든 길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장명수/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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