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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명복

입력
2004.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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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테러단체에 의해 피살된 김선일씨는 미국에 비판적인 말들을 많이 남겼다. AP통신이 공개한 비디오 테이프에서 김씨는 "부시는 진짜 테러리스트다"라고 비난했고 미군병사에 의해 검문수색을 당하던 경험을 몸짓으로 설명하며 미군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억류상태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가 납치단체의 호감을 얻기 위해 과장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씨가 생전에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미국의 만행'운운 하는 표현을 전한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군을 상대로 '전쟁사업'을 하는 업체의 직원으로 일하는 신분이었다.■ 시신이 되어 돌아온 김씨를 맞으면서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무엇보다도 그가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는 안타까움이 잦아들지 않기 때문이다. 피랍에서 피살까지 23일 간 그는 구명의 손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발 벗고 뛰어도 시원찮을 판에 정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고, 업체 사장이 혼자 협상을 벌인다고 했지만 납치단체 입장에서 그를 협상상대로 여기지 않았음은 그 결과가 말해준다. 외교부에 김씨 실종여부를 물었던 AP의 취재과정에서 그가 살아날 단서가 나올 수도 있었다. 외교부 직원이 대수롭지 않게 이를 묵살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AP측에도 원망이 생긴다. 언론기관으로서 직접적 잘못은 없다 해도 한 젊은이의 생명이 달려있는 사안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면 그렇게 어설픈 기계적인 취재로 끝내버릴 일이 아니었다는 아쉬움이다.

■ 국민과는 또 다른 이유로 심한 충격을 받은, 또는 받아야 할 사람은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노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궁극적인 책임을 가지기도 하지만, 무능과 안일에 빠진 해당 부서들의 보좌를 전혀 받지 못한 사각상태에 있었다. 노 대통령은 김씨가 벌써 피살된 시각에 '협상이 희망적' 이라는 엉터리 보고를 받았고 그날 밤 외교부를 격려 순시하는 일정에 따랐을 정도였다. 결과가 드러난 뒤 아랫 사람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대로(大怒)했을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느 부서에서도 제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한 흔적이라곤 없었으니 눈앞이 캄캄하지 않았을까.

■ 노 대통령은 김씨 피살이 전해진 뒤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가슴이 미어진다"고 비통한 심정을 밝혔지만 사실 그의 마음 속엔 무능한 기관과 참모들에 대한 분노가 더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곧 이어 청와대 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있을 법한 절차 하나를 지나쳤다고 한다. 평상심이 무너졌던 탓일까. 회의는 김씨를 애도하는 묵념 없이 대통령 착석과 함께 그냥 시작됐다는 것이다. 다음 날 노 대통령은 외교안보 라인에 대한 감사원의 전면조사를 요청했다. 그 기관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분노이자, 무너진 정부시스템의 자인인 셈이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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