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된 남자아이를 둔 A씨는 요즘 무척 초조하다. 하루에도 악동과 천사로 수없이 변신하며 엄마 아빠를 웃고 울리던 아이의 말문이 좀처럼 트이지 않아서다. 18개월 된 딸을 둔 친구녀석이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으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때가 되면 말문이 트이겠지 하며 무작정 두고 보기도 왠지 무책임한 것 같고, 병원에 데리고 가 언어치료를 받기도 어째 꺼림칙하다. 자기와 아내의 잘못된 육아법 때문이라며 시작된 고민은 눈치도 없이 점점 커져만 간다. 아이가 혹시 자폐증은 아닌지, 언어 능력은 지능 발달과 정서에 직결된다는데 커서도 남들에게 뒤쳐지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닐까.결론부터 말하면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는 저마다 개인차가 있어 말이 조금 늦다고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신체나 정신적인 이상으로 언어장애를 보이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말을 배우는 시기에 부모의 관심과 역할이 어느 때 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아이의 첫말, 그 벅찬 감동
일반적으로 유아는 생후 9개월이 되면 ‘엄마’ ‘까까’ ‘맘마’ 등 한 두 개의 단어를, 1년이 되면 5개 안팎의 단어를 말한다. 그리고 18개월이 지나면 비로소 2개의 단어를 결합한다. 21개월에 ‘공’ ‘멍멍’ ‘컵’ 등 최소 20 단어를 사용하던 아이의 언어습득능력은 더욱 빨라져 만 2세가 되면 약 200개의 단어를 익히게 되고 식탁에서 ‘고기’ ‘빵’ 등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사물의 명칭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후 33개월엔 4개의 단어를 한데 묶어 구사하고, 36개월엔 가족말고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어휘가 최소 500개가 된다. 60개월 된 아이는 추상적인 단어의 의미를 물어보고 적절하든 적절하지 않든 그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 3세 이후에도 말 못하면 치료해야
그렇다면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는 언제 필요한 걸까.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홍성도 교수는 “아이가 말이 아닌 몸짓으로 의사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거나, 매사 발달이 늦어 사회성이나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때 자폐를 의심해 봐야 한다”며 “3돌 이후에도 말을 못한다면 병원에 가야 한다” 말한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하면 치료 시기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이나 머리를 돌리지 않는다(6개월)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10개월) ▦“안돼" “빠이 빠이” 등의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응이 없다(15개월) ▦10개의 단어를 말하지 못한다(18개월) ▦간단한 지시에 반응하지 못한다(21개월) ▦신체부위를 가리키지 못한다(만 2세) ▦아이가 말하는 것을 가족이 알아들을 수 없다(만 2세 반) ▦단순한 문장을 사용하지 못하고, 질문하지 못하며, 아이가 말하는 것을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다(만 3세) ▦지속적으로 받침을 발음하지 못한다(만 3세 반).
- ‘수다쟁이’엄마가 되라
유아들의 언어장애 원인은 크게 신체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으로 나뉜다. 신체적 요인은 정신지체, 청각장애, 안면구조의 이상이나 성대, 구순, 구개가 파열됨으로써 구강구조상 발음을 잘 못하는 경우들이다.
이 같은 신체적인 문제를 간과한 채 “아이가 말귀는 잘 알아 듣는데 말은 못한다”며 나중에 말문이 열리기를 막연히 기대하다가는 아이의 언어 장애를 더 키울 수도 있다. 아이에게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즉시 성형외과 이비인후과 소아정신과 등에서 1차 진료를 받은 후 언어치료기관에서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환경적 요인은 아이가 자라는 가정의 분위기와 직결된다. S대병원 언어청각치료실 K치료사는 “부모나 다른 양육자가 말이 없고 환경적 자극이 없을 때, 또는 허약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아이의 요구를 알아서 들어주는 과잉보호 부모 밑에 말이 늦은 아이가 많다”면서 “잘못된 육아방법이 아이의 말 발달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꼬집는다. 아이에게 자주 말을 거는 ‘수다쟁이’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 조급증보다 사랑으로 대해야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주고 반응을 해주는 것 이외에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홍성도 교수는 “놀이방을 보내든지 이웃의 또래들과 접촉할 기회를 많이 갖게 해야 한다”며 아이에게 ‘말할 필요성’을 만들어 주고 사회성을 키워줄 것을 권한다. 이때 같이 노는 친구들에 비해 아이의 언어능력이 많이 떨어지면 자칫 따돌림을 당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동요를 들려주고 동화책을 읽어줘 아이에게 언어적인 자극을 주는 것도 좋다.
전문가들은 또한 부모들의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직 말할 준비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억지로 말하기를 강요한다면 오히려 입을 열기는커녕 더욱 닫아버리는 역효과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아이에게 세심한 사랑으로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엄마, 이렇게 해보세요
1. 아이에게 말하도록 압력을 주지 마라.
사기만 떨어뜨린다. 아이들 스스로 말하고 싶은 때를 결정하도록 한다. 어른들은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아이들에겐 어른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2. 아이에게 말을 많이 해주어라.
아이는 언어적 자극이 많을수록 말을 일찍 하게 되고 더 잘한다. 아이는 말하지는 못해도 부모의 말을 모두 듣고 있다.
3. 아이가 말할 때마다 항상 반응을 보여라.
아이가 입밖에 내는 모든 소리에 보상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더라도 "우리 아이 참 말을 잘하는구나"라는 식으로 칭찬해준다.
4. 아이의 말에 살을 붙여서 다시 말해라.
아이가 옹알이를 하더라도 아이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보다는 "응, 맘마 먹고 싶어? 맘마 줄까?"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문장으로 답해주는 것이 좋다.
5. 아이 행동에 맞춰 어른이 대신 말을 해줘라.
아이가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을 부모가 말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아이가 TV 만화를 보고 있다면 "야! 만화구나. 아이 재미있어" 아이의 입장에서 말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6. 아이에게 많은 질문을 해보아라.
"이게 뭐야?", "이것은 어디에 놔 두어야 하지?" 등 다정하게 질문을 던지면 아이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7. 다양한 제스처를 사용하라.
아이는 몸짓이나 눈맞춤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에 더 익숙하고 편안해한다. 또한 부모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8. 실수를 비판하지 말아라.
아이의 말을 문법적으로 지나치게 자주 교정해주면 오히려 입을 닫거나 말을 안 하려고 하는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
9. 아이보다 말을 약간 더 잘하는 또래와 놀게 하라.
언어를 배우는 주요 경로 중 하나가 또래들과의 교류이다. 아이보다 너무 말을 잘 하는 친구들과 놀다 보면 의사소통이 잘 안 돼 자칫 소외를 당할 수도 있다.
10. TV를 통한 듣기 훈련만으론 부족하다.
언어란 주고 받는 것이다.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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