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초 나온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마이 라이프’가 국내외 출판시장을 휩쓸고 있다. 하긴 집필료가 1,000만달러(115억원) 이상에 이르고, 출간 전 예약주문만 200만부가 넘었던 책이므로 그럴 만도 하다.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국내 출판시장에서도 초판 5만부가 금방 팔려 재판을 찍는 기록을 세웠다.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걸까. ‘신변잡기 잡탕메모’식의 내용도 거슬렸지만, 졸속 번역은 짜증을 더해준다. 예를 들면, ‘지역 신문은 특집기사를 싫었다(실었다)’ ‘AP연합(AP통신)과 다른 많은 작은 신문…’ 등 맞춤법이나 고유명사가 틀리고, 오자와 탈자는 예사였다. 또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어색한 표현과 비문(非文)도 수두룩하다.
‘말썽꾸러기 로저는 호프(도시 이름) 남서 무기성능 시험장을 둘러싼 전시의 활황을 이용하려고 호프로 왔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몇 번 넘어졌지만, 나는 그것이 고통의 시작점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칸소에 연방대법원에 올라간 중요한 사건이 생겼을 때, 나도 그곳에 갔지만, 이야기는 조에게 맡겼다’ ‘이마의 흉터는 점차 내 머리 가죽으로까지 번졌다’
영어를 그대로 직역해 늘어놓은 문장, 거칠고 유치한 표현 등은 번역자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국내에서 1급으로 꼽히는 번역자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문제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국내출판사는 영어 원고를 불과 40일 전에 받았다고 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3, 4개월이 소요되는 번역을 아무리 뛰어난 번역자라도 그 기간에 끝내기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번 회고록은 세계 30여개 국에서 출간계약을 맺었으나, 미국과 동시에 나온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유명인사의 회고록 출간을 전세계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내려는 출판사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욕심은 노벨문학상 수상작 발표 후, 며칠 만에 뚝딱 번역해 내놓는 책처럼 독자들을 우롱하고 실망시킬 가능성이 높다. 늦게 나와도 좋으니 제발 정확하고 꼼꼼하게 번역된 책을 보고 싶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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