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받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쁜 일입니다만, 비평가로서 팔봉비평문학상을 받는 기쁨은 특히 각별합니다. 이 상의 역대 수상자들이 모두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은 자신이 잘 아는 법이지만 일종의 자동화 현상 탓으로 그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는데, 수상이 그 점을 날카롭게 일깨워준 것입니다.날카롭게 일깨워진 이 감각에 기대어 비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최근 중국에서 벌어진 루쉰(魯迅) 논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논쟁은 네티즌과 작가들이 주역이 되어 루쉰에 대한 종래의 비평을 비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루쉰 텍스트의 정전성(正典性, canonicity)에 대한 비판입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루쉰 텍스트의 정전화(正典化)는 마오쩌둥주의와 국가주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지식인들의 계몽주의 담론이 루쉰 텍스트를 새롭게 정전화했습니다. 그 정전화들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이 그 비판에 자동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판이 정당한 것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텍스트에 대한 존중과 경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해석(혹은 해석들)에 대한 추구가 있어야 하겠고, 기왕의 해석들의 상대적 의미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하겠으며, 그와 동시에 자기해석의 상대성에 대한 객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그렇기는커녕 심지어 루쉰 텍스트의 정전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루쉰 텍스트 자체를 아주 간단하게 부정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전화들은 결코 루쉰의 의도도 아니었고 루쉰 텍스트의 의도도 아니었는데, 루쉰 텍스트를 정전화한 비평에 대한 비판이 어느 틈에 루쉰 비판으로 바뀌곤 합니다.
저는 작가의 의도가 텍스트의 본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도 않습니다. 텍스트에는 텍스트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의도는 작가의 의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또 보통 말하는 의미의 고정된 의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잠재태이고, 적절한 해석들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실현되는 그런 의도입니다. 이 의도가 텍스트를, 창작을 충일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이에 비하면 비평은 결핍된 존재입니다. 텍스트의 의도와의 교섭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비평이 자신의 결핍을 망각할 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발생하는지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또한 바로 그 결핍으로부터 비평의 진정성이 나옵니다. 비평에서는 결핍이 의미를 가능하게 합니다.
저의 부족함이 비평의 결핍과 같은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러나 부족함에 대한 자의식을 비평의 자의식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노력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예리하게 일깨워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민엽/서울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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