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냉면은 더 이상 별식이 아니다. 사시사철 냉면을 파는 전문점들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더위가 엄습해 입맛이 없거나 뭔가 강열한 음식이 먹고플 땐 냉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톡 쏘는 겨자와 식초가 어우러진 시원한 국물은 생각만 해도, 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그럼 평양식과 함흥식 중 어느 것을 먹을까. 질긴 면발과 맵고 진한 냉면 비빔장으로 속을 긁고 싶다면 물론 함흥냉면이, 거칠고 쉽게 끊기는 메밀 면발과 시원한 국물이 생각난다면 평양냉면이 어울린다. 하지만 냉면 맛이라고 항상 그 맛에 머물까? 물론 아니다.
냉면에 새 명가(名家)가 뜬다. 옥천냉면, 유천칡냉면, 산봉냉면, 녹차냉면 등이 그들이다. 평양이나 함흥 등 전통 방식의 냉면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느낌이 다른 이들 신흥 냉면이 전통 냉면에 버금가는 이름을 떨치고 있다. 평양과 함흥에 더해 새로운 고유명사로 자리잡은 것은 이들 냉면은 새로운 조리 방식과 독특한 맛으로 냉면 마니아들을 유혹한다. 이래서 음식은 새로 태어나고, 또 경쟁하고, 그리고 새 전통이 생겨나는가 보다.
쫄깃, 매콤, 새콤, 시원…! 냉면이 가진 새로운 맛의 조합을 느껴 보자. 그리고 육수 한 사발을 벌컥 들이키며 여름을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 날씨는 더워도 입안에서 만은 옛날 어르신들이 추울 때 시린 이빨로 딱딱 부딪히며 먹던 냉면 맛이 되살아나는 듯 하다.
●옥천면옥 (031)772-5187 경기 양평군 옥천면
냉면은 육수가 맛을 좌우할까, 아니면 면발이 중요할까? 경기 양평의 옥천면옥은 ‘물’로 승부한다. 산좋고 물맑은 동네, 양평의 구석에서 인근 군부대 군인들을 상대로 냉면을 팔기 시작한 옥천면옥은 한자리에서만 45년째 맛을 이어오며 ‘옥천냉면’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얻었다.
도심에 흔히 볼 수 있는 근사한 인테리어나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골식당 분위기 그대로인 이 집 냉면 맛도 겉모습 그대로다. 면발은 쫀득한 듯 하면서도 입 안에서는 매끄럽게 잘리고 물냉면의 육수는 맑고 깨끗한 지하수의 청량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면발의 비밀은 함흥식 고구마와 감자 전분, 평양식 메밀가루, 그리고 약간의 밀가루를 배합하는 비율. 뜨거운 물로 반죽해 뽑아낸 면발을 차가운 지하수에 곧바로 식혀내니 더 쫄깃해지고 시원해진다.
소고기 양지와 설깃, 우설 등 살코기를 대여섯 시간 고아 끓여낸 육수에도 청량한 맛이 배어 있다. 뜨거운 육수를 밤새 흐르는 차가운 지하수에 식히기 때문. 집에서 담근 간장과 대파 양파 무 등 갖은 양념이 들어가 깊고도 진한 맛을 낸다. 약간 진한 베이지색을 띠는 면발은 도토리빛의 육수와 잘 어울려 보기에도 새로운 맛을 기대케 한다.
물냉면이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면 비빔냉면이 기다린다. 똑 같은 면발에 육수없이 좀 매운 듯한 다대기를 넣고 비벼 먹는데 겨울에 특히 잘 나간다. 남자들이 시원한 물냉면을 즐기는데 반해 여자들은 비냉을 더 찾는다. 5,000원.
●유천칡냉면 (02)485-4500 서울 풍납동 본점 등 전국 100여 지점
칡가루가 들어간 면발, 매콤한 다대기가 들어간 육수, 평양식도 함흥식도 아닌 맛은 유천칡냉면만의 트레이드 마크다.
유천칡냉면이 처음 태어난 것은 1983년. 남편 최일경씨가 중동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면서 아내 우화자씨가 살림에 보탠다고 조그만 냉면집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테이블 4개만 놓고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냉면을 만들어 팔았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 100여개가 넘는 프랜차이즈를 거느린 유명 냉면업소로 성장했다. 처음 시작한 장소가 유천연립에 살 때여서 주변 사람들이 유천냉면이라 부른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됐다.
이 집 냉면은 식탁에 오를 때 육수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육수를 냉동시켜 얼음으로 만든 다음 빙수처럼 갈아만든 살얼음이 그릇을 채운다. 면발을 다 먹을 때쯤 녹는데 이 때 후루루 들고 마시면 된다. 시원하면서도 속을 확 뚫어주는 육수 맛은 우씨가 손수 개발한 다대기에서 나온다. 이 집은 육수가 평양식처럼 시원한데도 다대기를 넣는다. 고기와 각종 재료를 고아 만든 육수는 엷은 커피색을 띤다.
연한 밤갈색을 띠는 면발은 칡가루와 메밀, 고구마와 감자 전분, 밀가루 등이 골고루 들어간다. 충남 금산에서 직접 운영하는 공장에서 가져오는데 면발을 뽑는 즉시 냉동해 매장에서 다시 삶아 낸다. 면발을 말리지 않고 급냉해 보관하는 것은 면발에 함유된 촉촉한 수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면발 위에 얹어지는 커다란 배 조각도 이 곳만의 전매특허이다. 최고급 신고배만을 구입해 저장해 두고 1년 내내 쓰는데 크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을 자랑한다. 직접 빚어 내는 만두는 만두 파동과 관계없이 변함없이 잘 나가는 메뉴. 메밀은 몽골에서 직접 수입한 것만을, 고추도 직접 빻고, 참기름도 직접 짠 것만을 쓴다.
●동치미사골냉면-산봉냉면 (02)557-2222 서울 대치동, 광화문 여의도 압구정동등 4개 지점
‘이름이 냉면 맛을 내는 것은 아니다.’ 산봉냉면은 이런 고집으로 고유의 냉면 맛을 제공하는 집이다.
산봉냉면은 원래 종전 그랜드 백화점에 있던 냉면집. ‘빨간구두아가씨’ ‘맨발로 뛰어라’ 등의 히트곡을 남긴 가수 남일해씨의 아내인 영화배우 주란지씨가 운영하던 곳이다. 부산 출신인 주씨는 시원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의 냉면맛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집 냉면은 고구마 전분 100%를 사용한다. 뽀얀 빛깔의 면발은 씹으면 질긴 것 같지만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든다. 부드러운 질감이 소화가 잘 될 것만 같다. 동치미와 사골국물, 생수를 일정 비율로 섞어 만든 육수는 진하면서도 시원하다. 고명으로 얹어지는 얼갈이(어린 배추)김치에 배어 있는 다대기는 매콤한 맛까지 더해준다.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처럼 맑은 물을 쓴다고 가게 이름도 ‘산봉(山峰)’이다. 6,500원.
콩가루와 찹쌀가루, 부침가루, 밀가루를 배합한 반죽에 새우, 오징어 조갯살 등 해물과 쪽파 고추를 넣고 부쳐낸 파전도 별미. 겨울에는 굴과 홍합이 대신 들어간다. 1만5,000원. 아들 정수원씨가 광화문 등 4곳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백리향 (02)789-5741 서울 여의도 63빌딩 57층
중식당에서 여름한철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중국 냉면. 중식당 마다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맛을 내지만 백리향은 녹차냉면을 개발, 유명해졌다.
녹차냉면은 녹차가루를 섞어 반죽을 했기 때문에 면발에서 초록의 시원함이 느껴진다. 색깔도 초록빛이 나지만 시원한 차 한잔을 들이마시는 기분 그대로다. 쫄깃하면서도 차가움이 면발에 배어 있는 듯하다. 마시는 녹차는 아니지만 먹는 녹차라는 점에서 웰빙 메뉴인 셈.
몸에 좋은 생강과 파, 살이 질긴 노계(노계), 돼지뼈 등을 넣고 푹 고아 만든 육수는 시원하고 개운하다. 땅콩소스와 겨자 소스를 뿌릴지 여부는 개인 자유. 고명으로 얹혀진 양파와 소기기 해삼 해파리 동고버섯 등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영양만점이다.
/박원식기자 parky@hk.co.kr
■냉면 맛있게 먹는법
냉면은 지역에 따라 재료 및 성분 함량이 달라 맛에서도 차별화된다. 보통 평양식 냉면은 메밀이 많이 함유된 냉면으로 육수의 시원한 맛을 찾는 이에게는 제격. 반면 감자전분이나 고구마 전분의 함량이 많은 함흥식 냉면은 쫄긴듯 질긴 면발과 맵고 진한 비빔장이 특징이다.
냉면은 무엇보다 차게 나온 직후 빨리 먹을수록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식초나 겨자는 기호에 따라 넣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영양학적으로는 넣는 것이 유리하다.
신맛을 가진 식초는 중요한 조미료이면서 피로회복제로서의 효능도 갖고 있다. 녹말이나 육류 등을 먹으면 대사과정에서 유산이 생성되는데 이것이 쌓이면 피로가 가중된다. 식초는 이 유산을 처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또 여름철에 냉면을 먹고 배탈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는 냉면사리를 삶은 물이나 육수에 섞인 대장균 때문이다. 새콤한 맛과 함께 강력한 살균력을 가진 식초는 육수를 산성상태로 만들어 유해세균의 번식을 억제한다.
한방에서 따뜻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겨자 또한 차가운 성질의 메밀을 보완해줘 몸을 보해주는 특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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