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대개 뉴스, 시사교양(정보), 드라마 및 예능오락으로 구분된다. 텔레비전을 전적으로 언론 매체라 부를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뉴스'만이 신문에 비견되는 보도물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이 이미 환경감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가 신문의 스트레이트 기사에 비유된다면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신문의 특집기획물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텔레비전 뉴스가 칼럼이나 사설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기자의 리포트에 가치가 개입되는 예는 드물지만, 앵커의 입을 통해 사안에 대한 적극적 해석이나 논평이 제기되는 것이다. 중견 기자 출신의 앵커가 단순한 진행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자 노력하는 점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쟁점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하는 것과 가벼운 감성적 코멘트를 던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난 주말 MBC '뉴스데스크'의 앵커는 "(정치권을 가리키면서) 언제까지 이럴 건지 답답하기만 합니다"라든지 "이거 뭐 군사작전도 아니고 말이죠"라는 멘트를 했다.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기 위한 표현방식이나 말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쟁점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돕는 '분석적' 멘트는 아니다. 앵커가 칼럼니스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논쟁은 뒤로 미루더라도, 이같은 멘트는 칼럼이나 사설이 아니라 만평에 가깝다. 댄 래더나 피터 제닝스같은 앵커가 수 십 년간 미국 방송계를 지배해온 원동력은 튀는 재기가 아니라 냉철한 분석과 해석이었다. '센세이셔널리즘'이 아니라 '저널리즘'이었다.
그렇다면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사회자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장르적 속성을 고려한다면, 용인될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이 뉴스에 비해 넓은 것이 사실이다. 주의·주장이나 나름대로의 평가가 제기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분별한 '감정적 비판'까지 허용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다시 쟁점이 되고 있는 탄핵관련 방송에서도, 시사교양 프로그램 사회자가 "동물들만도 못한"이라든지 "저런 작태"와 같은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는 점은 비판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많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지향점은 탐사 저널리즘이다. 사회자가 이 '탐사'를 이끄는 선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선동적이기보다는 성찰적이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겸손이 부재 한다면 이 역시 폭로적 센세이셔널리즘에 가깝다.
기자 리포트를 적당히 요약하는 것이 앵커의 역할은 아니다. 아이템들을 소개하고 연결만 하는 것이 시사교양 프로그램 사회자의 역할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저널리스트 대신 시인을 지향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신선한 스타일'의 앵커가 바람직한 역할 모형으로 여겨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또한, 자신의 주장을 감정적으로 펼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자상이라고 여기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시청자들을 설득시키는 가장 큰 힘은 스타일이나 감성이 아니라, 결국 내용과 논리이다.
윤태진/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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