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라디오 '여성시대'의 진행자 송승환씨. 23일 아침 그는 방송에서 "어제 TV 마감뉴스를 보고 김선일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잤고, 오늘 아침 신문에도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나왔는데…"라고 했다. 담담하지만 뼈있는 말이었다.우리 국민은 모두 22일 밤 TV 뉴스를 통해 그(김선일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고 잠 들었고, 새벽에 급하게 기사를 바꾼 신문을 본 아주 일부 서울 시민들을 제외하고는 23일 아침까지도 '김선일씨 살아있다' 는 극단적인 단정에서 '김선일씨 신변 안전한 듯' 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읽고 안도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22일 밤 10시께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통상부 청사 11층에 마련한 종합상황실에 들렀을 때, 최영진 외교통상부 차관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보고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시각, 김씨의 시신은 팔루자 근처에 버려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 자지라 방송이 내보낸 살해 직전 마지막 화면을 보고 납치범들이 미국인 닉 버그를 잔인하게 살해한 알 자르카위와 비슷한 강경파 조직임을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낙관했다. 정부는 이미 김씨가 살해된 한참 뒤에도 여전히 '그가 살아있다'고 발표했다. 언론 역시 그런 사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보도해 결과적으로 김씨 유가족과 국민에게 엄청난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한심한 것은 그 거짓말의 근거들이다. 정부도, 언론도 22일 밤 아랍위성 TV인 알 아라비야가 화면 아래 자막으로 내보낸 "한국인을 억류중인 납치범들이 요구시한을 연장했다"는 것, 이라크에 진출해 있는 한 사설경호업체 대표가 동업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한 사실에 의존했다. 심지어 한 중동전문가의 입을 빌어 김씨를 납치한 무장단체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를 저항조직을 흉내낸 단순 범죄조직일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분석까지 했다.
납치범들과 접촉 통로조차 직접 갖지 못한 정부와 언론의 경솔한 '장밋빛' 전망과 믿음은 협상과 대응전략에 엄청난 착오를 불러왔고, 그만큼이나 국민들을 경악하고 분노케 만들었다. 국민들의 항의전화는 23일 새벽 외교부에만 쏟아진 게 아니었다. 이날 아침 김씨의 살해소식을 알게 된 독자들의 전화가 신문사로도 쇄도했다.
이들의 분노는 경솔한 정부와 언론 두 곳을 향해 있었다. 실체도 모르면서 '파병원칙'을 공식 표명하는 등 납치범들을 자극하는 정부의 서투른 대응 방식과 정보력 부재, 엉성한 근거를 토대로 턱없이 '희망'만 말한 언론에 화를 냈다. TV의 경우, 23일 새벽 1시 50여분부터 지상파 3사가 일제히 뉴스 속보나 특보 체제로 아침까지 김선일씨 살해소식을 보도했지만, 새벽4시가 넘도록 MBC가 앵커 멘트를 통해 짤막하게 오보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했을 뿐, '언제 그랬냐'는 태도로 '경악'만을 반복했다. 방송 몇 시간이 지나도 정부의 잘못이나 자신들의 잘못을 짚어보고 반성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국민 모두가 '살아서 풀려 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김선일씨 피랍사건에 정부가, 언론이 '희망'을 갖고 접근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치밀한 전략이나 노력, 혹은 구체적 근거 위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정부도, 언론도, 국민들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판단할 기회를 잃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나? 정부나 언론이나 부끄러운 줄 알자.
/이대현 문화부장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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