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한명회’에서 권모술수의 달인이자 처세의 화신 한명회를, 영화 ‘살어리랏다’에서는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백정 만석을 빼어나게 그려냈던 이덕화. 그는 요즘 KBS 1TV 일일드라마 ‘금쪽 같은 내 새끼’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툭하면 시집간 딸을 불러내 술집 마담 앞에서 자식 자랑을 늘어 놓는 푼수 화가로 나온다.그러나 ‘애정의 조건’에 출연하고 있는 정한용과 이보희에 비하면 양반이다. 정한용은 사기꾼 출신 목욕탕 때밀이로 이보희는 맹한 성형미인으로 등장한다. 하기야 트로이카 여배우 장미희는 4월 종영한 SBS ‘흥부네 박 터졌네’에서 꽃뱀 연지 역을 맡았으니 말해 뭘 할까. 이들은 분명 임현식이나 김인문 주현 오지명처럼 본래부터 코믹한 이미지를 지닌 연기자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자신들이 쌓아올린 이미지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이른바 ‘망가지는 역할’을 대대수의 중년 연기자들이 맡는 이유는 분명하다. TV 드라마가 중년들의 삶을 반추하는 방식은 지극히 이분법적이고 협소하다.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며 창창한 젊은이들의 앞길을 훼방 놓는 방해꾼 부모이거나, 코믹하고 엉뚱한 중년으로 극의 중심 스토리가 힘에 부칠 때면 으레 등장해 짭짤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약방의 감초’ 정도에 그친다. 그 이상의 공간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도 제대로 그려내기가 벅찬 한국 드라마는 실업의 위기와 부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대화 단절 등으로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이땅의 중년들을 결코 리얼하게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니 사극 을 빼면 중년 연기자들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갈고 닦으며 검증 받은 연기력을 온전히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을 수 밖에. 그렇다고 아예 은퇴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다.
이들에게 ‘망가지는 캐릭터 연기’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중년만이 할 수 있는 원숙하고 부드러우며 매력적인, 대장금에서 양미경이 보여줬던 쿨(Cool)한 중년상은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그건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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