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내게 '친정집' 이자 '호적등본' 이요, '생활기록부' 같은 존재다. 창간 5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감회에 젖어 가슴이 후끈하게 달아 오를 정도니 말해 뭘 할까. 그 웅숭깊은 인연의 시작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일보가 발행하는 주간한국은 나와 우리 집 사람(탤런트 김민자)이 연애를 한다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일말의 감정은 있었지만 서로 내색하지 않았던 터라, 같이 찍은 사진까지 박아 넣은 그 기사는 장안의 화제였다. 고백하건대 그때는 잘못하다 들킨 것처럼 싫고 부끄러웠다.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아내와의 결혼에 골인했으니, 결과적으로는 기사 덕을 좀 본 셈이다. 아내와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도, 1984년 부모 없이 시설에 맡겨진 18명의 아이들을 초대했을 때도, 한국일보는 우리 곁을 지켰다. 그뿐이 아니다. 오늘날 연기자 최불암이 있게 한 것도 한국일보의 힘이 컸다. 1968년에 나는 연극 '환상살인'으로 '한국연극영화상'(후에 명칭이 '백상예술대상'으로 바뀜)을 수상했다. 참 기막힌 게 오태석씨가 극본을 쓰고, 임영웅씨가 연출한 '환상살인'은 기억력을 잃어버린 한 사내가 무대에 나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연극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일보는 상을 줬다.
말없는 언어를 평가할 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날 충분히 놀라게 했던 한국일보는 1974년 또 한번 나에게 충격을 줬다. 신문에서 TV는 영 인정을 해주지 않던 그때, 일찌감치 국내 최초로 TV관련 상을 만든 것이다. 그때만 해도 TV 보급률은 낮은 때였는데 한국일보는 예술상에 과감히 TV 부분을 포함시켰다.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최고 일간지로 성가를 올리던 한국일보가 TV 부문상을 신설하고 지면에 본격적으로 관련기사를 늘린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TV 드라마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됐다. 탤런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물론이며 연기자들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했다.
게다가 나는 MBC 드라마 '한백년'으로 TV부문 최우수 연기상의 첫 수상자가 되는 영광까지 안았다. 상을 받던 날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한국일보 12층 홀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으나 어색한 분위기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 때였다. 한국일보의 사주인 백상 장기영 선생이 단상으로 올라가셨다. 마이크를 잡은 백상 선생은 대뜸 "최불암씨 어디 있소"라고 외치며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놀라 허둥지둥 잔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 단상 쪽으로 다가갔다. 밑에서 인사를 꾸벅 올리니 손을 내밀며 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등을 툭툭 치더니 객석 쪽으로 몸을 세운 후 관객에게 나를 직접 소개했다.
한국일보 12층 수상식장 무대에서 감사인사를 하던 때가 생생하다. 백상예술대상을 타고 난 뒤 요즘 말하는 '스타'가 됐지만, 그보다 연기자로서의 책임과 진지한 자세를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연기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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