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인들에게 준 충격은 미국인들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에서 느낀 충격과 흡사하다고 일컬어진다. 북한은 인접국이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곤 일본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게 사실일 것이다. 냉전의 영향으로 중국, 소련과 같이 한덩어리로 보였던 북한이 따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일본 본토에 대한 최초의 군사적 위협이었던 대포동 미사일 발사이래 일본에서는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인식이 아주 커졌다. 미국과 함께 미사일방어체제의 연구개발에 돌입한 것도 이때부터였고, 군사적 목적의 위성발사를 계획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98년 각의 결정한 군사위성의 도입은 2003년 4기의 위성 발사로 현실화되었다.북일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한 것은 납치문제였다. 97∼98년경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북한공작원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는 북한과 일본사이의 관계정상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면서 북일간에도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북한은 시종일관 거부해왔던 납치자문제에 대한 조사를 행방불명자라는 명목하에 시행했고, 북일간의 비밀교섭을 통해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김정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9·17 평양선언에서는 납치문제에 대한 사과 및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한편, 핵 및 미사일문제 등 포괄적인 안보문제 해결 가능성도 시사하였다. 또한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후 일본이 북한에 대해 단계적으로 경제협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도 명시했다.
그러나 납치된 일본인 중 8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일본의 대북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2002년 10월초 북한측이 제시한 사망원인도 의문투성이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일본의 북한 두들기기는 본격화되었다. TV와 신문에 납치문제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2002년 10월 중순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의 방북때 북한의 비밀 핵개발 의혹이 표면화되면서 북한은 믿을 수 없는 나라, 일본에 위협이 되는 나라, 예측 불가능한 독재자의 나라라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일본내 재일조선인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걸어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될 정도였다.
납치문제가 커다란 정치이슈로 등장하고 북핵문제가 점점 국제화되면서 일본내에서는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쑥 들어가고,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커져만 갔다. 대북관계 개선을 주장하던 타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심의관이 테러를 당할 정도였다. 2003년 북한의 위협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유사사태법이 통과되었고, 북한에 대한 송금을 금지할 수 있는 외환관리법 개정안과 만경봉호의 입항을 막을 수 있는 특정선박 입항금지법이 국회에 상정됐다. 미사일 공격에 대비하여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성급한 논리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일본의 핵무장론까지 고개를 들었다. 북한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본이 전수방위정책에서 적극 방위정책으로 바꿔나가는 구실을 제공한 격이 되었다.
북한에 남아있던 납치 생존자의 가족송환문제가 정치이슈로 전면에 등장하자 2003년 말부터 자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이를 타결하려는 물밑접촉이 이루어졌고, 외무성에 의한 비밀교섭도 진행되었다. 북한은 일본 정부의 고관이 평양으로 마중을 온다면 가족들을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5월 14일 고이즈미 총리 자신이 방북할 것을 결정하고 5월 22일 평양을 재차 방문해 생존자 가족 8명 중 5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명은 미군 탈영병 가족이어서 법적인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같이 오지 못했다. 2차 정상회담은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를 56%까지 올려놓았다. 반면 북한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하고 대북 제재를 발동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도 높다.
고이즈미 총리는 재임중 전후 일본외교의 가장 큰 숙제의 하나였던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키려는 개인적인 의지를 갖고 있다. 언젠가 북일관계 정상화의 날은 올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이 그리 빨리 도달할 것 같지는 않다.
납치문제의 완전한 해결, 국제사회가 납득하는 핵의 완전한 폐기, 그리고 일본을 위협하는 미사일문제의 해결 등 여러 사안들이 포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일본에게 북한은 수교와 위협이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서 있다. 이를 어느 쪽으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일본뿐만 아니라 북한의 전략적 선택여하에 달려있다. 북한경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고 일본의 경제협력을 기대할 것인지, 김정일 체제의 안전보장을 위해 핵무장이라는 위험한 승부수를 던질지에 따라 일본의 대응도 달라 질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최근 2차 방북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핵을 갖는 것으로 얻는 것과 핵을 가지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북한의 선택의 중요성을 시사한 말이다.
협찬 : SK주식회사
박철희 외교안보 연구원 교수
/ 40세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석사)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저서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시공사) 등
■국교정상화 '엇박자' 12차례 회담 성과없어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회담은 지금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2002년 10월 열린 제12차 회담 이후 중단된 상태이다. 국교정상화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달 22일 두번째로 북한을 방문했지만 회담의 조기 개최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북일 양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국교정상화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제적 파탄 상황에서 허덕이고 있는 북한은 북일 국교정상화가 체제 생존을 위한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9·11 테러 이후 한층 강화된 미국의 압박과 붕괴위기의 경제난을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 카드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고이즈미 총리와의 제1차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 마저 시인하는 등 적극적으로 임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일본도 최근 들어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한 지역 내 영향력 강화와 북한과의 원치 않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판 마련 등 군사·안보적 이유에서 관계정상화가 절실해졌다. 여기에 외교적 성과를 정치적 지지도에 활용하려 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개인적 취향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회담은 1991년 1월∼1992년 11월 8차례, 2000년 4월∼2000년 10월 3차례가 각각 열렸다. 90년대의 회담에서는 전후보상과 북한의 핵사찰 등이 주요 의제로 논의됐으나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범인인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 일본인 '이은혜'의 존재가 불거져 나와 회담이 중단됐다.
2000년 3차례 회담에서는 일본이 "납치문제와 북한 미사일문제가 국교정상화의 전제"라고 주장한 반면, 북한은 "과거 청산과 보상을 먼저 해야 한다"고 맞서 또다시 회담이 결렬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제1차 방북 이후 한달 뒤에 열린 제12차 회담은 기대를 모았으나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한 여론의 역풍으로 결국 좌초했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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