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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레이건, 1980년대의 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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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레이건, 1980년대의 잔영

입력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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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 '서울의 봄'을 맞았다. 18년 군사독재 끝에 마침내 민주화의 기회가 왔다. 군부 음모에 대항하던 그 처절한 봄, 그러나 미국정부는 한국민에 등을 돌렸다. 카터 정부는 우리의 희망을 저버렸다.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묵인한 것이다. 카터 인권외교의 이중적 위선이 드러났다.카터는 그 해 공화당에 패해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다. 레이건은 우리를 더 절망케 했다. 취임한 후 광주 민주화항쟁을 유혈로 진압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첫 워싱턴 국빈으로 불러 환대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참기 어려운 수모였고 쓰라린 좌절이었다. 레이건은 집권 69일만에 한 청년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사적인 얘기지만, 그 3월 30일 외신부 야간근무를 한 탓에 저격사건에 대한 기억이 뚜렷한 편이다. 시내판도 마감된 새벽녘,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었다. "레이건이 저격 당했다"는 워싱턴·LA 특파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텔렉스들도 일제히 급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분초를 다퉈가며 호외를 제작했다. 경쟁지도 호외를 발행했으나, 우리는 호외와 함께 본지 특별판도 만들었다. 특별판을 제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종'의 자랑이 돌아왔다. 다행히 총탄은 심장에서 1인치 옆에 박혀 레이건은 무사했다.

시골대학 교수로 돌아간 카터는 그 후 사회봉사와 저술 등에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면서, 개인적 신뢰를 회복해가고 있다. 레이건은 집권 첫해 전후최악의 불경기를 맞았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그러나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국민의 인정을 받는 데 성공했다. 불경기 속에 그의 단호한 인플레 정책은 인정을 받았고, 경기회복에 따라 신뢰도가 더 올라갔다. 청렴도에서도 좋은 점수를 얻었다.

레이건의 재임 8년 간은, 전두환 군사독재 기간이기도 했다. 그 기간 중 한국민의 민주화 열망은 레이건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 미국 반체제 학자 촘스키는 '레이건은 침략과 테러를 총지휘하며 많은 인명을 앗아간 테러범일 뿐' 이라고 말한다. 명분을 만들어 힘없는 적을 괴롭힌 비겁자라는 것이다.

우리의 당연한 부정적 평가나 촘스키의 혹평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미국인이 레이건을 존경한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 학자들에 따르면 레이건의 보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도, 그의 정치적 성실성은 인정했다고 한다. 일관된 이념과 충실한 신념을 좋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결단력과 자신감 넘치는 이미지도 영도력의 바탕이 되었다.

최근 레이건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많은 인파가 죽음을 슬퍼했다. 고인의 가장 민감한 적수였던 구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도 추도문을 남겼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인 대통령'이라는 신문 기고문이다. '레이건의 궁극적 유산: 그는 대화를 믿었다'라는 편집자의 부제도 달려 있다. 추도문이 칭송으로 흐르기 마련이지만, 이 대목은 고인의 덕목을 엿보게 한다. <…레이건은 남이 동의하든 안 하든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그는 독선적이지는 않았다. 협상과 협력을 추구했다. 내게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그가 미국 국민에게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레이건은 미국적 대통령이었을 뿐, 영웅도 위인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미국에 대한 환멸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성대한 장례식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복잡하다. 우리의 환멸과 미국인의 존경이 충돌하고 있다. 모순된 기억을 갈무리하려는 때,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다시 한국의 이라크 추가파병 일정이 발표되었다. 여당의 젊은 의원들은 미국 비판 성명서를 발표해서 파장이 일고 있다. 개화기 이래 미국은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정치문화에서 든든한 원조자이자 후원자였으며, 한편으로는 제약이자 한계였다. 은원(恩怨)이 뒤얽혀 있다. 레이건의 타계가 새삼 애증관계를 성숙하게 발전시키는 숙제를 떠올려 주고 있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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