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국일보의 나이가 오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놀랐다. 하나는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아직 환갑도 안되었다니 '젊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내가 한국일보 얘기를 하자면 지난 몇 년의 사연도 있겠지만, 역시 백상(百想) 장기영 선생과 처음 상면하던 70년대 초가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장길산' 연재 상의차 그를 만나러 처음 방문했던 날이었다. 편집부로 올라가는 계단의 층계 참마다 무슨 표어처럼 붓글씨로 씌어진 그의 말들이 허름한 유리 액자에 걸려 있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이러했다.
"뛰면서 생각해라." "기자가 현장에 없다면 신문도 없다."
하여튼 그것은 사령관이 직접 내무반에 지침을 적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이었고, 힘차게 계단을 두어 칸씩 뛰어 올라가는 사람의 숨가쁜 호흡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받은 첫 인상은 신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전업작가'라는 개념도 없었고, 원고료마저도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피차 우물쭈물 해버리던 시절이었다. 술 한잔으로 원고료를 때우거나 지면 한 귀퉁이에 실어주면 그마저 다행이었다.
나는 출발부터 글 쓰는 자로서 '프로'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글 쓰는 선비가 매문을 하는 것은 아주 천박하거나 예술정신에 어긋난 짓이라는 당시의 문단 분위기가 매우 못마땅했다.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그에 대한 보수를 받는 일은 근대 이래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매문' 운운 하는 것은 오히려 일종의 위선이라고 보았다. 글을 쓰든 옹기를 만들든 생업을 가진다는 것은 원래 호사가의 취미가 아닌 것이다.
물론 내가 백상 선생에게 그것도 초면 인사의 자리에서 '선금을 많이 주셔야 좋은 글이 나오겠다'고 불쑥 내민 것은 젊은 날의 호기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는 크게 웃더니 대뜸 "글 좋게 쓰기 아주 쉽구먼" 그렇게 말했다.
백상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자료비로 거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주의도 잊지 않았다. "술 다 먹지 말고 반은 자료비로 쓰게" 했는데도 역시 그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냄새를 맡은 문우들이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얼마 후에 나는 신문사로 찾아가서 다시 선생에게서 자료비를 받았고, 선생이 제발 이번에는 자료를 준비하라며 당신의 단골 술집 명함을 내밀며 "술은 차라리 내 앞으로 달고 여기 가서 마시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연재를 시작한 이후에도 가끔씩 펑크를 내기 시작하자, 당시로서는 바둑대회를 주최할 정도로 조용하고 아늑했던 비원 앞 운당여관에 집필실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 때의 한국일보는 백상을 닮아 그랬던지 뚝심이 있고 패기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신문이었고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신명을 바친다. 신문은 언제나 독자들의 것이다. 신문이 힘을 잃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독자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잃기 시작할 때부터일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오십 줄이라면 중늙은이지만, 또한 뭔가 새로 시작하기에도 아직은 늦지않은 나이기도 하다.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얻은 뒤에 활력을 보탠다면 지난 일들은 겨우 출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종이 매체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진단 따위는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신문의 영향력이나 권력에 대한 과욕에서 비롯된 예측이다. 자기 할 일만 분명하게 정한다면, 아직 석양은 멀고 갈 길도 많이 남아있다. 고통의 반 세기를 넘어서 도달한 생일과 새로운 통일의 시대로 향한 출발을 동시에 축하드린다!
※편집자주/소설 '장길산'은 1974년 7월부터 1984년 7월까지 무려 10년 간 2,092회 한국일보에 연재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