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곡·가사·시조 등 이른바 '정가(正歌)'의 어법으로 음악극을 만든다? '정가극'이라는 새 장르가 초연된다는 소식을 듣고서 필자를 포함, 여러 사람이 보인 첫 반응은 "그렇게 느린 노래로?" 그리고 "재미는 있겠네" 였다. 17∼20일 국립국악원(7월 1일 남원 공연 예정)에서 첫 선을 보인 '황진이'는 과연, 느리디 느린 가운데 나름의 '맛'이 있는 무대였다.이렇게 남도 판소리 이외의 전통성악 어법으로 새로 짠 음악극으로는 앞서 '경서도(京西道)소리극'이라는 것도 있었다. 최근의 이러한 시도들은 판소리에 바탕한 창극과 여성국극의 중요한 패인(敗因) 하나를 극복했다.
그 패인이란, 1인 서사물인 판소리의 내러티브를 근대적 희곡으로 성공적으로 탈바꿈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서도소리극이나 정가극은 판소리처럼 미리 짜여 있는 내러티브를 물려받지 못하고 새로운 각본을 창출 또는 각색한 위에 소리를 입혀야 했으므로, 극으로서는 오히려 창극을 능가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대신 경서도소리나 정가의 연주자들은 소리꾼들이 지닌 아주 중요한 자산 하나를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판소리 창자들이 수련의 초기단계부터 억양, 표정, 몸짓 등 '연기' 수업을 병행하는 데 반해, 노래만 집중적으로 수련해 연기 쪽은 별도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정하게 앉은 자세에서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노래로 훈련받은 정가 가객(歌客)들에게 이 '연기 핸디캡'은 특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겠는데, 이번 '황진이'에서 이러한 우려는 엉성한 연기로 현실화하고 말았다.
'황진이'의 음악은 전통 정가 그대로 또는 노랫말만 바꿔 쓴 것이 대략 절반, 그리고 나머지는 창작곡(이준호 작곡)들이다. 단아한 전통곡과 국악가요풍의 신작곡들 사이의 양식적 괴리가 자주 거슬리기는 해도 출연자들의 가창 실력만은 거의 흠잡을 데 없어서, 정가에 귀맛을 들인 사람이라면 유장한 노랫가락에 90분 내내 심취할 수 있는 흔찮은 기회다.
정가 특유의 '느림의 미학'을 고수한 것도 음악극으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귀로는 자막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우리말 음악극에서 나랏사람들을 상대로 자막이라니!
정가의 저변이 좁다 보니, 지방에 터잡고 있는 몇 명 빼고 현역 가객들은 거의 전부, 심지어 일부 대학생들까지 무대에 서야 했다. 집안잔치라서일까, 중진일수록 짧더라도 중량감 있는 배역을 맡기는 '예우'가 더러 거슬리고, 공연 후 커튼콜에서는 주역인 황진이보다도 '연륜과 위계'가 오히려 더 대접받는 어색함도 아쉽다.
그런데 도대체 왜 판소리, 경서도소리, 정가 동네가 따로따로 음악극을 보유해야만 하는 것일까? 물려받은 유산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김세중·서울대 국악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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