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한국일보와의 첫 만남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한국일보 호외에 내 기사가 나온 것이다. 1964년 9월 13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일이다.한국일보 9월 14일자 호외에는 갑작스런 경기 지역의 폭우로 양주군 일대에서 주민 96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톱기사 아래에 '풀잡고 10킬로 떠내려 오던 경희대학원생 구출'이란 작은 기사 하나가 붙어있다. 그게 바로 나다. 기사에 '윤무부(24)' 라는 이름도 나온다.
나는 당시 대학원 1학년생으로 새에 미쳐 있었다. 초가을의 철새 이동을 연구하기 위해 몇일 동안 경기도 광릉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크낙새 서식을 관찰하고 참새, 촉새, 흰베맷새 등을 포획해 다리에 가락지를 끼워 날려보내는 일을 하며 개울가에서 며칠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러다 한밤중에 개울물이 불어나는 날벼락을 맞아 무려 15㎞ 정도를 떠내려갔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서울의 워커힐 부근이었다. 강가로 간신히 걸어나왔는데 그때 마침 근처에서 취재를 하던 한국일보 차량을 만난 것이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는 실신 상태의 나를 차에 태워 구리의 한 병원에 옮겨주어 난 살아났다.
그러니 한국일보는 나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난 그 당시 낡은 호외를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사를 11번이나 다니는 바람에 그만 안타깝게도 스크랩북을 잃어버렸다. 겨우 복사본만 간직하고 있다.
이후 한국일보와 나는 참으로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한국일보는 자연과 환경에 정말로 관심이 많은 신문이었다. 난 70년대와 80년대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들과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당시 김운영, 김해운 기자의 모습이 특히 눈에 선하다. 한여름 거제도에서 처음으로 팔색조를 찾아내 촬영에 성공한 일이 기억난다.
상록수림의 가시덤불을 헤매던 장면이 눈에 아른거린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는 죽어도 팔색조를 찾겠다는 각오로 2주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섬을 헤맸다.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크낙새 가족을 1974년 8월 경기도 광릉에서 찾아내 촬영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신문 1면에 크게 보도된 크낙새와 그 새끼 세 마리 사진은 지금 한국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한국일보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한국 50년 한국일보 50년'전에도 걸렸다.
천연기념물과 희귀조류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이리저리 뛰면서 셔터를 눌러대던 기자들의 모습에서 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자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1978년에 '새보기 여행'을 시작한 신문사도 한국일보였다. 당시 내가 도움을 주었는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사적인 인연도 있다. 35년 전 충남 예산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날은 바로 한국일보가 주최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날이었다. 그때 신부와 함께 TV를 봤는데 미스코리아들도 아름다웠지만 나의 색시에게 "당신이 더 아름답다"고 말해준 기억이 난다.
지난주 열린 제40회 미스코리아대회에서 나는 심사위원장을 맡게 됐는데 이것도 한국일보와의 인연인가 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