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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석류/최일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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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석류/최일남 지음

입력
2004.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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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최일남 지음

현대문학 발행·9,000원

"빨리 먹은 콩밥 똥 눌 때 보자는 식으로 어깃장을 놓으며, 사람들의 골목이나 그늘을 줄창 더듬었다. 단조로운 내리닫이 역사의 틈을 파헤쳐 주석이 본문을 압도하도록 기를 쓰고 있다."

질주하는 고속철도, 아침형 인간, 땀 흘리며 러닝머신을 타는 헬스센터의 남녀노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일상의 풍경들이 인생의 의미 전부가 돼버렸다. "거시적 담론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집착하는 쪽으로 인심이 기운지 오래"인 요즘, 소설은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4년 만에 나오는 최일남(72)씨의 열세번째 소설집 '석류'는 이런 고민에 대한 깊고 향기로운 성찰이다. 노작가의 감칠맛나는 단편 하나하나에는 우리의 작고 가벼운 상념에 가려져버린 '진짜 세상 읽기'가 매우 유려하고 맛깔스런 방식으로 담겼다.

'명필 한덕봉'은 대서(代書) 가문 2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에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모색해본 작품이다. 대서사인 아버지는 해방 직후 혼란 속에서 돈벌이를 하려고 우익단체의 홍보물 쓰기를 시작했다. 어느새 정치가 지망으로 변한 아버지를 보고 둘째 아들 한덕봉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 달필인 형님이 아버지의 반대쪽인 좌익의 선전문구를 쓰는 것도 혼란스러웠다. 재주는 대물림이어서 나이 들어 회사에서 사훈과 발령, 표창장 등 육필 쓰기를 도맡게 된 한덕봉은 가끔씩 떠오르는 아버지와 형님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진다. 속도전인 세상에서 손으로 글씨 쓰는 것은 문학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작은 틈새로 바라본 세계'이고 '세상을 살아낸 어떤 증거와 확신'이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사물의 종말을 뜻하는 비감'으로도 비추어져 안타깝다.

표제작 '석류'는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한 세상 저쪽의 허물을 굽잡아 살짝 구슬리는 족족 밉지 않게 대드는' 입담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마른 새우는 왜 넣습니까. 고놈의 긴 수염이 입천장을 찌르기에 알맞고." "저런 멸치 말고도 땅의 푸성귀가 온갖 해물과 만나 우려내는 국물맛의 조화를 설마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요." "하여튼 국물들 좋아해요. 국에다 밥 말아먹는 민족이 온 세상에 또 있을까." 따라 읽기만 해도 어깨가 들썩여지며 웃음이 나오는 말잔치가 계속되다, 죽은 여동생을 회고하는 어머니의 얘기에 닿으면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폐렴을 앓던 여동생이 석류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는 이틀을 헤매 석류를 사들고 왔다. 동생은 고맙다, 하고 어머니는 목이 메는데 그 석류가 손톱도 안 들어갈 정도로 굳어 있어서 둘 다 석류를 벗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난하고 배고팠을 적 눈물겨운 정 나누기와 함께 작가가 되살리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우리말은,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노년에 접어든 네 사람이 자유당 시절과 50년대 얘기 등 지난 세상사를 돌아보는 단편 '멀리 가버렸네'에서 숨가쁜 요즘 세상에서 어떻게 소설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엄정한 답변을 만날 수 있다. "진정한 역사가는 서민의 술상에 오르는 잡담마저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더라. 그만한 정신으로 큰 줄기를 도모하라는 얘기겠지. 너무 가깝고 자잘한 것들의 나열에 치우치면 곧 한계에 부딪힐 뿐더러 쓰는 재미도 반감될 게다." 삶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되 그것을 통해 큰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소설 쓰기의 구실이다. 노작가는 밀도 높은 창작집 '석류'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고 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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