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위해 정치권에 뛰어들었습니다."질풍노도의 시기였던 1980년대 열린우리당 민병두의원은 혁명을 꿈꿨다. 그는 학림사건과 제헌의회사건을 비롯 1990년 김근태의원, 이부영 전의원과 함께 활동했던 전민련을 끝으로 재야 운동계를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한국민주화운동사의 중심축이었다. 비록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차례나 옥고를 치렀지만 "결코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민의원은 이후 기자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는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기획기사를 통해 1998년 국회 국정감사를 시민단체가 감시·평가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듬해 보궐선거 때는 시민단체가 선거운동사무소를 24시간 감시하고 후보자가 선거비용을 매일 공개하도록 앞장섰다.
총선을 불과 두 달 앞둔 지난 2월 그는 "진정한 개혁세력이 원내 다수당이 되는데 힘을 보태겠다"며 우리당에 입당했고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는 그에게 총선기획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민의원은 우리당이 200석도 가능하다며 한나라당이 '거여건제론'을 내세웠을 때도 '과반은 물론 제1당도 어려울 수 있다'는 '뜻밖의' 진단을 내리며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그는 "다들 엄살이라고 했지만 그걸 확신했고 그 때문에 수도권의 투표율을 15%이상 끌어 올려 승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의원은 현재 당 국회개혁단간사, 당기획위원장으로 우리당이 사활을 걸고 있는 개혁과제실현 전략을 짜고 있다. "16대 친일청산특별법의 경우처럼 개혁과제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국민여론의 지지를 얻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는 그는 "개혁의 고삐를 당기는 데 맨 앞에 서겠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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