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대신해 정부가 직접 나서 재벌의 행태를 규율하는 재벌정책은 1981년 공정거래법이 제정되면서부터 시작됐다.이후 정부는 갈수록 비대해지는 재벌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으나,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역대 정권의 재벌정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의 일관성 부족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우선 역대 정권마다 출범 초기에는 재벌개혁을 내세웠으나 후반기에는 친(親)재벌쪽으로 후퇴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재벌정책의 핵심인 출자총액 제한과 재벌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 제한 규정의 변천 과정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재벌 계열사의 순환출자를 막는 '출자총액 제한' 규정이 도입된 것은 1987년. 당시 출자한도는 40%였으나, 8년 뒤인 1995년 출자한도를 25%로 낮추는 방식으로 대폭 강화됐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전격 폐지됐다가 2001년 다시 25%로 부활됐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재벌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도 1987년 도입 당시에는 의결권 행사가 전면 금지됐으나, 국민의 정부 말기인 2002년 의결권을 30%까지 인정하도록 완화됐다.
재벌 정책이 '대 재벌'과 '중소 재벌'에 차별적으로 집행된 것도 문제다. 경제력 집중 방지가 명분인 재벌정책이 정권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으로 집행돼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손보는' 식의 자의적 재벌정책이 이어져 왔다. 전두환 정권의 국제그룹 해산, DJ정권의 '빅딜 정책'이나 대우·현대그룹 처리 등이 그 대표 사례이다.
재벌정책이 '컨트롤 타워'없이 추진되면서 공정위와 재정경제부 등 관련부처가 상충된 정책을 내놓고 다투는 일도 개혁의 추진력을 약화시킨다. 실제로 공정위와 재경부는 지난해 말 '시장개혁 3개년 계획'에 합의하고도,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해 여전히 이견을 노출하고 있다. 특히 공정위가 재벌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을 현행 30%에서 15%키로 축소키로 한 상황에서, 재경부가 재벌이 은행이나 다른 금융사를 우회적으로 지배할 소지가 있는 '사모펀드 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것은 당사자인 재벌은 물론 시장 참여자에게도 혼란을 주기에 충분하다.
재벌정책이 일관성을 잃었다는 지적에 대해 주무부처인 공정위는 반론을 펴고 있다.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향후 재벌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될 것이라는 게 공정위의 주장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이 제대로 이행될 경우 3년 뒤에는 내부견제시스템 정착, 지주회사로의 전환 등으로 재벌총수의 황제경영에 따른 위험이 크게 감소하게 된다. 또 출자총액제한 등 비시장적인 재벌관련 규율도 자연스레 대폭 정리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시장개혁 3개년 계획'에 따라 그동안 행태규제로 치우쳤던 재벌정책이 시장의 힘을 빌어 경쟁을 촉진하고 독점을 축소·제거하는 쪽으로 진전되기는 했으나, 기업분할조치, 공익소송, 사소(私訴) 활성화 등 개인이 시장원리에 따라 거대 재벌을 견제할 수 있는 구체적 장치들이 마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 본보, 국민의식 여론조사
한국일보가 참여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애증(愛憎)'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경제를 이 정도까지 끌고 온 주역이라는 평가와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부의 불평등 분배를 초래한 주범이라는 시각이 교차한다. 그래서 참여정부 재벌개혁 속도에 대해서도 재벌을 너무 궁지로 몰아넣어서는 안된다는 견해와 지금 이상으로 속도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략 반반 정도로 나뉜다. 그러나 개혁을 하더라도 재벌이 앞으로 어떤 모습, 어떤 체제로 변화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는 시장원리에 맡겨둬야 한다는 입장은 분명했다.
우선 재벌체제에 대한 기본적 시각은 부정적이라는 대답이 긍정적이라는 응답보다 근소하게 앞섰지만,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불공정한 경제질서를 초래하는 등 득보다 실이 많다"는 대답이 50.2%, "경제성장을 이끄는 주역으로 실보다 득이 많다"는 응답이 44.7%였다. 고도성장기를 목격한 50대 이상일수록 긍정적 대답이, 외환위기의 고통이 더 기억되는 20∼30대는 부정적 응답이 많았다.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재벌을 보는 시각은 덜 냉랭했다.
향후 재벌개혁 속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지나치게 밀어붙이고 있으므로,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42.3%에 달했다.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추진돼야 한다", "현재 수준이 적당하다"는 대답은 각각 34.6%, 20.4%로 나타나 지금 수준이나 그 이상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55%에 달했다.
그러나 재벌체제 변화의 방향에 대해서는 정부가 어떤 목표를 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투명경영 등 지배구조 개선에 역점을 두면 된다는 의견이 절대 다수였다.
재벌체제의 변화 방향에 대해서는 46.6%가 "시장 원리에 맡겨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응답이었다. "지주회사 등 제3의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와 "독립기업으로 전환, 사실상 해체해야 한다"는 각각 23.9%, 17.2% 수준에 머물렀다.
재벌개혁에 역점을 둬야 할 정책도 소유체제를 바꾸는 것보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였다. "투명경영 등 지배구조 개선"이 50.7%로 가장 많았고, "부당한 부의 세습 방지"(17.2%), "오너경영 등 소유구조 개선"(15.1%)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전문가 제언/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되 재벌체제 공고화는 막자
흔히 우리경제를 '재벌경제'로 부를 정도로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삼성, LG, 현대차, SK 등 상위 4대 그룹의 수출액이 국가 전체의 절반에 이르고, 국내 총생산(GDP) 비중은 42%에 달한다.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재벌정책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재벌정책과 관련, 두 가지의 끊이지 않는 논쟁이 있다. 하나는 재벌해체 논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논쟁이다.
먼저 재벌해체 논쟁을 보자. 재벌의 사회·경제적 폐단이 크므로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과 재벌의 경쟁력이 결국 국가 경쟁력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그러면 어느 주장이 옳을까?
재벌이 핵심역량에만 집중한다면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대기업이나 다름없다. 28개의 자동차 관련 계열사로 이루어진 현대자동차를 계열사를 문어발식으로 거느린 다른 재벌과 견줄 수는 없다. 현대자동차가 도요타를 능가하고, 포스코가 신일본제철보다 앞서려면 우리나라 대기업은 더욱 커질 필요가 있다. 재벌을 유지하든지 쪼개서 개별기업으로 하든지의 여부는 시장 여건에 따라 재벌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며, 정부가 개입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럼 출자총액제한제도도 폐지돼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존재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작동하도록 하는데 순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벌 일가는 5% 내외의 지분만 갖고 있으나, 계열사간 순환출자로 40% 이상의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는 자본주의 원칙에 반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은 또 장기적으로 경영권 방어에 도움이 된다. 이 제도를 폐지 또는 완화하면 단기적으로는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어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가공자본에 의한 소유지배는 적대적 M&A의 표적이 될 수 있다. SK글로벌의 부실로 SK글로벌과 연결된 계열사의 주가가 동반하락하고 외국자본이 SK그룹의 핵심 기업인 SK(주)의 지분을 쉽게 취득한 것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총액제한제도는 시장원리에 부합해 기업을 경영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제도를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집단소송제 등 시장감시장치가 일부 도입되었으나 지배주주의 불합리한 경영관행을 견제할 수 있는 기업 내·외부 통제시스템이 아직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장자율 감시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될 때까지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유지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이 그렇듯 재벌정책에도 절대적 진리는 없다. 다만 현재 상황에서 적합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데, 요즘 같은 상황에서 주목할 이론은 프랑스 경제학자 멜랑보(Malinbo)가 주장한 '지배효과(Domination effect)' 이론이다. 지배효과 이론이란 정부가 적절히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힘이 센 기업이 작고 약한 기업을 짓누르고 삼켜 결국은 수 개의 거대 기업들이 나라 경제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벌이 아니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되, 재벌체제가 공고화해 경쟁이 줄어들고 나라 경제 전체가 약화되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시장지향적 재벌정책인 셈이다.
송하성 경기대 교수/전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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