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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12·끝>와세다대 이성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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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12·끝>와세다대 이성시 교수

입력
2004.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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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양국의 '역사 영유권'논쟁은 고구려사에 앞서 발해사를 두고 이미 한 차례 벌어졌다. 한신대 임기환 연구교수에 따르면 1962년 박시형이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를 통해 한국사에서 발해사를 새로 자리매김한 것을 바탕으로 북한 학계는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발해와 신라(후기신라)의 병립시대를 설정, 고조선→고구려 →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서술 체계를 갖추었다. 북한 체제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고려였다.이런 가운데 1980년대 들어 중국이 소수민족 정책과 관련해 마련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바탕, 발해를 '당(唐)의 지방정권' '당대(唐代)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면서 만주지역에 대한 중국사 시대 범위를 당대로 끌어 올렸다. 이에 대한 반박은 북한보다는 남한 학계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남한 학계는 분단 극복과 민족통일 실현이라는 과제를 염두에 두고 '남북국시대론'을 전개하는 한편 발해의 종족과 문화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라는 역사인식을 강화했다.

이 논쟁에서는 발해 건국자와 주민 집단의 종족 문제, 책봉―조공 문제, 발해 문화와 고구려·당 문화와의 연관성 등이 쟁점이 됐으나 양측 민족 개념의 현격한 차이 등으로 조금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중국의 중화주의적 시각이 문제가 된 한편으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만 자리매김해 당시 동아시아의 역동적 상황을 간과했고, 발해 이후 만주지역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드러내는 등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한중 양국의 역사인식이 부딪치고 있다. 국민적 반발에 떠밀려 한국 정부는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해 공식적 대응에 나섰으나 문제의 성격상 해결점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으로 국내 학계에서는 민족주의 정서에 바탕한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 공간이 넓어지는 가운데 고구려사 집착에 대한 학문적 회의도 학계 일각에서 일고 있으나 본격적 토론의 장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국내 학계와 한 발 떨어져 이 문제를 지켜보고 있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이성시(李成市)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해 보았다.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의 배경은 무엇인가.

"중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의 개혁·개방 정책과 92년 이후의 급속한 시장경제화에 따라 국내적으로 다원성, 분산성, 원심성의 기운이 높아져 왔다. 또 정치·문화의 면에서 지역주의적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등 표면적 통일과 안정의 이면에 민족·지역의 통합 모습을 둘러싼 물밑의 모순과 불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중국의 주변부에서는 탈(脫)중국화 추세가 있으며 이른바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에 대한 경계심도 고조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애국심'이란 이름 아래 사회주의를 대신하는 통합의 이데올로기로서 '중화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다. 취지문에 '국가통일, 민족단결, 변경 안정의 대목표'가 제시된 것처럼 '동북공정'은 우선 중국 국내 문제 해결 방안의 일환이다. 더욱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92년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과 중국 동북지역, 특히 옌볜(延邊)자치주의 인적 교류가 크게 늘어나는 가운데 고구려사, 발해사를 자국사로서 내걸고 '선조의 땅'을 방문, 조사하는 한국인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나아가 최근의 북한 정세에 대한 대응책의 성격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중국은 과거에도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국의 역사를 기록해왔는데 현재의 '동북공정'과는 어떻게 다른가.

"과거 중국의 이른바 정사(正史)의 열전(列傳)에 기록된 중국 주변 제민족의 기록과 현재의 '동북공정'을 동일선상, 또는 연장선상에서 볼 수는 없다. 그런 시각은 시대착오적이다. '동북공정' 문제는 현재 중국 정부의 현실적 제정책과의 관련성을 냉정하게, 또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

―고구려사를 중국사 체계에 편입한다는 것이 어떤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있나.

"국제 학계 차원에서 현실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중국이 그런 역사인식을 국제적 학술토론의 장에서 발표해 인정을 받거나 하는 따위는 생각하기 어렵다. 과거 중국은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전개해 공자비판을 철저하게 행지만 공자에 대한 평가가 중국 내외에서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고구려를 비롯해 고조선과 부여, 발해 등의 역사를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하나. 당연히 그 맥이 한국사에 이어졌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요동지역사 차원에서 봐야 하나.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에 바탕해 '한국사다''중국사다'하는 식으로 고대사를 확연히 구분해 보려고 하는 그 자체가 무리다. 유럽의 고대사를 참조해 보는 것도 현재의 굳어진 시각을 교정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중국은 '동북민족발달사'의 틀 안에서 숙진(肅眞) 이래 만주족까지의 역사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런 틀 자체가 근대에 들어 일본이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상한 데서 출발했다. 중국이 근대국민국가의 영역을 자명한 전제로 삼아 자국사를 구상하고, 한국이 근대 국민국가의 민족을 전제로 자국사를 바라봄으로써 마찰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으나 이번 사태를 오히려 그런 논리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역사가 있음을 서로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역사 연구에서 현재의 민족 개념을 고대사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

"그런 물음을 국제적 역사학회 모임에서 한다면 비웃음을 살 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고대국가의 구조를 생각해 봐야 한다. 또 현재와 같은 '민족'개념 자체가 18세기 이전에는 존재할 수도 없었다. '민족'이란 역사적으로 출판자본주의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 등 어떤 특수한 조건 아래 성립돼 상호인지의 한 양태로 만들어진 집단의식일 뿐이다.

예를 들어 고대국가라는 조건 아래 고구려 영역에 살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서로가 '고구려인'임을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국가는 교통과 정보 전달체계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백제의 경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조차 달랐다."

―고구려나 발해 등의 고대국가 형성 과정과 종족 구성은 어땠나.

"고대사는 지배층인 왕경(王卿)을 중심으로 한 지배공동체와 다른 민족과 부족, 지방 토착민 등으로 구성된 피지배공동체의 끝없는 지배·복종 관계의 변화의 역사이다. 따라서 지배 영역의 변동이 수시로 있었고, 이에 포섭된 민족(종족)은 복합적이다. 고구려는 예(穢)·맥(貊)·말갈(靺鞨)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됐다."

―고구려나 발해 등의 멸망 후 유민들의 행방은.

"고구려나 발해의 국가 형성이 앞서 말한 대로 복잡한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부여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발해나 통일신라로, 발해에서 요(遼)나 통일신라로 넘어가는 과정도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극히 일부는 새로운 국가의 왕족이나 귀족으로 편입됐지만 대부분은 피지배공동체로서 새 국가에 포섭됐다."

―고구려인의 정체성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나.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내용 정도가 있지만 거기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는 없다."

―현재 국내의 고구려사 열기의 문제라면….

"역사연구자가 국민을 선정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역사적 사고를 배제하고 고구려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내세워진 판단의 기준도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냉정한 역사분석 방법과 태도가 지금 가장 필요하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했던 중국이 왜 고구려사 재해석에 나섰느냐 하는 문제와 함께 현재 한국의 고구려사 인식이 타당한가도 생각해야 한다. 고대사 연구는 누가, 언제, 어떤 의도로 바라보기 시작했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 한국민의 고구려사 인식 자체도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인가.

"고려의 권신이었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기 전까지 '고구려사는 우리 역사'라는 인식은 없었다. 참된 역사 인식이라면 김부식이 왜 고구려는 집어 넣고, 발해와 가야는 버렸는지를 통해 고려 왕조의 역사 의식을 따져보아야 한다. 더욱이 현재 한국의 고구려사 인식은 구한말 민족의 단결을 위한 장치로서 재해석된 '삼국사기'에서 비롯했다."

황영식 편집위원/yshwang@hk.co.kr

사진:도쿄=송두영 기자

●이성시 교수 약력

1952년 일본 나고야(名古屋), 52세 와세다대 동양사학과 와세다대 문학부 박사 요코하마(橫浜) 국립대학 조교수 와세다대 문학부 교수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1998∼1999년) 저서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고대 동아시아의 민족과 역사''동아시아문화권의 형성''만들어진 고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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