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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슬그머니 돌아온 감성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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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슬그머니 돌아온 감성정치

입력
2004.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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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참여정부 2기 출범으로 산적한 민생 문제가 하나, 둘 차분하게 풀려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마침내 정치권 모두 '돌격 앞으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여야는 물론 여권 내부에서도 배수진을 친 격돌의 양상이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정치인이 정치적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정책 사안에 대하여 뚜렷한 소신을 밝히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을 다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라도 계급장 운운하며 한판 하자는 식의 정치는 곤란하다. 검찰총장마저 대검 중앙수사부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인지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러한 일방주의적 밀어붙이기식 정치 행태가 권위와 질서를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사회에서 권위주의 극복이 권위의 부정으로 이어지기 시작했고,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질서의 근간이 흐트러지고 있다. 그렇다. 권위를 내세워 독재를 일삼았고 질서를 앞세워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정치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에 이러한 반작용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면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권위와 질서가 힘을 잃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계 타파를 앞세운 무질서의 광풍은 과거 절대권력의 횡포와 견주어 그 폐해가 결코 다를 수 없다.

무질서의 광풍 속에 정치언어는 폭력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당의 대변인들이 상호 비방의 악역을 맡아 거친 언어를 나누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요즈음은 너도 나도 서로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를 마구 사용하고 있어 거친 조폭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지난 수년간 조직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인기를 누리더니 사회 분위기를 잘못 넘겨짚은 전략인지, 인격적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지 안타깝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밀어붙이기식 정치와 언어폭력이 손을 잡으면 이성적인 정치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데 있어 특히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된 점만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자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개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을 수구라는 틀에 묶어 소외시켜서도 안된다. 거친 정치언어와 배수진을 친 정치의 조합이 감성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원색적인 언어와 과장된 제스처 정도로 충분하다. 결국 정치를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극적인 감성의 정치는 그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조폭 영화의 인기가 쉽게 시들해진 이유와 같다.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진정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지만 우선 정치권의 자성이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정제된 정치언어를 차분히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권위를 구축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또 다시 대통령직이나 정부의 명운을 쉽게 운운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당정 관계나 당청 관계에도 조속히 새로운 질서와 권위를 복원해야 한다. 당정 협의가 과거처럼 대통령이 정당을 압도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없고, 전개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행정 부처가 주요 정책사안에 대해 일관된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할 수 없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다.

국민들은 품위 있는 정치를 원한다. 원색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단기간의 주목을 받는 정치가 아니라 곰삭은 청국장의 언어를 구사하는 중후한 정치를 보고 싶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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