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트렌디 드라마 등에 밀려 설 자리가 좁아졌지만, 1980년대 KBS 'TV문학관'의 인기는 대단했다. 문학 작품을 아름다운 영상에 밀도있게 담아내면서도 대중성 면에서도 성공을 거둬 폭넓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대가 바뀐 뒤에도 문학과 영상의 행복한 만남을 추구해온 'TV문학관의 대부' 장기오(58) 대PD가 30일 정년 퇴임한다. "33년 몸 바친 KBS에서 정년을 맞았으니, 상(喪)으로 치면 '호상(好喪)'이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아쉽고 착잡하다"는 그에게 뜻 깊은 '선물'이 주어졌다. 지난해 방송한 HDTV문학관 '누구에게나 마음 속의 강물은 흐른다'로 9일 상하이 TV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 격인 백목련상을 받은 것.
19일 오전 10시40분 2TV에서 재방송하는 '누구에게나…'는 일에 미쳐 살아온 50대 방송사 촬영감독(전무송)이 신혼여행 이후 처음으로 함께 여행에 나선 아내(김윤경)에게서 느닷없는 이혼 요구를 받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이야기. 이른바 '5060 세대'의 고뇌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설악산 등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에 실어 잔잔하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은 기획 단계부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너무 낡은 소재라고, 또 HD로 만들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두 차례나 퇴짜를 맞았다. 2002년 겨울 유난했던 폭설과 씨름하며 촬영을 마칠 무렵, '흡연 장면 추방' 결정이 내려지면서 이듬해 봄 약재상에서 구한 푸른 은행잎에 노란색 스프레이를 뿌려 가을 장면을 다시 찍기도 했다. 하지만 장 PD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런 얘기 만들어봐야 누가 보겠느냐"는 후배 PD들의 만류였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드라마도 젊은이들 취향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 인정해요. 하지만 이런 얘기도 누군가는 해야죠.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고. 시청률이 좀 낮더라도 5060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해요."
그는 내친 김에 KBS의 정체성 위기에 대해서도 쓴소리 한마디를 던졌다. "공영방송이라면 무조건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려 하기보다는 남녀노소 서민 장애인 등 여러 계층이 볼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라고 수신료 안 내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들도 보고 싶은 걸 볼 권리가 있습니다."
장 PD는 "PD가 뭐 하는 줄도 모른 채 군대 시절 가까이 지낸 고참을 따라" 방송사 시험을 봤고, 1971년 KBS에 입사했다. 80년 단막극 '인간극장'으로 데뷔해 'TV문학관' 26편을 비롯해 46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99년 드라마국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용감하게 현업에 복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인 그에게 KBS는 존경의 뜻이 담긴 '대PD'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대PD 칭호를 받은 이는 그가 처음이고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는 것은 조선시대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생을 그린 88년작 '사로잡힌 영혼'(극본 이상현). 화가이기에 앞서 자유인이었던 오원의 삶을 권력을 가졌으되 심신이 모두 갇힌 고종과 대비해 그린 작품으로, 그 해 제1회 프로듀서상과 이듬해 제25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등을 휩쓸었다. 그는 "임권택 감독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역시 오원의 삶을 그린 영화 '취화선'보다 나았다고 자부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문학청년이었던 장 PD는 얼마 전 '여의도 풍경'이란 수필로 '현대수필' 신인상을 받아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그가 참여한 동인지 '청색시대'도 7월 초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등처럼 시적 정서가 담긴 수필을 쓰고 싶다"고 했다. 프리랜서 PD로 작품 활동도 이어갈 생각이다. 모든 일에 여전히 열심인 그를 보자니 '정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란 말이 실감난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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