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한운사·81세"조선문학에 접촉할 기회가 없었어. 도쿄에서 1고에 들어갈려고 거기에 그냥 미쳐 가지고, 조선문학이 어딨는지도 모르고… 조선에 있었던 게 학생 때, 그것도 청주 증평 이런 데서 책을 사서 잡지에서 뭘 읽는다든가, 이런 게 일본 것만 읽었지. 학교에서도 '조선어독본'이라는 게 첨에 있다가 없어졌어. 그러니까 완전 일본놈이 된 거야."
●미술평론가 이경성·85세
"(현대미술관장으로) 2년 동안 있었는데, 국전 작가들, 노대가들이 사사건건 탓을 하는 거야, 잘 하라고. 그러고 보니까 그 국전이란 게 말하자면 암적 존재란 말야. 그래서 저거 안되겠다 해서 그때부터 국전 없애는 운동을 하는데 평론도 많이 썼고 말야. '고장난 방향감각' 이런 것을 탁 때렸더니… 그 양반이 노발대발하면서 운동장에서 만나자더니 나하고 욕을 막 하고 말야. 내 체면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걸 하냐고 뎀벼든 일이 있는데…."
문예진흥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가 3년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 예술사 증언 채록' 1차년 작업이 최근 마무리됐다.
80세를 넘긴 원로들의 구술은 문헌자료로 확인할 길 없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격동기, 한국전쟁 이후 50, 60년대 우리 예술사의 공백을 채워줄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헌은 일제 등 지배권력이나 이념 갈등 때문에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나마 예술 관련 자료는 망실된 것이 많아 증언에 의지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2005년까지 100인의 증언을 듣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도중 작고한 원로들이 잇따라 구술 채록의 중요성을 한층 실감케 했다.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은 증언 채록 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구술 채록 대상이던 시인 구상, 영화배우 독고성, 한만년 일조각 대표, 화가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 환기미술관장,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 김상용 선생 등이 별세했다.
지난해부터 1년 동안 구술한 문화예술인은 무용인 김천흥 송범, 화가 전혁림 김흥수 송혜수, 미술사가 진홍섭 황수영, 연극인 김동원, 시인 이기형 황금찬, 영화감독 유현목, 출판인 정진숙 선생 등 32명. 전문 연구가들이 한 사람마다 5차례, 모두 10시간의 증언 모습을 그대로 녹화하고 원고지 4만5,000여 장에 이르는 녹취문을 작성했다.
구술 채록 과정에서 연극배우 김동원씨는 일제시대 음반으로도 나와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 '동도'의 변사 김영환의 연기 몇 구절과, 동경학생예술좌와 현대극장에서 공연했던 '춘향전'의 한 토막을 직접 재연하기도 했다. 또 근대연극사의 유명 배우들인 황철, 김선영, 심영, 이화삼 등의 연기를 증언한 것은 물론 동경학생예술좌 창단 동인으로 알려졌던 박동근, 이진순, 이해랑 등이 2회 공연 때부터 참여했다는 점을 밝혔다.
어효선 선생은 서울 중산층의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 아동문학 독서 경험이 전혀 없었다며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증언했다. 유치원에서 배웠던 일제강점기의 교육 상황도 설명했다. 서양화가 전혁림씨는 원래 그림을 그리려던 게 아니고 문학을 하기 위해 일본어로 번역된 소설책을 엄청나게 읽었다며 자신의 그림 작업이 문학 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회고했다.
19일 오후 1시30분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에서는 1차년 성과를 정리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한국예술연구소 이인범 수석연구원은 "우리말과의 단절, 친일 문제 등 일제 식민지 경험이 예술인 개인에게 미친 영향이 원로들의 증언에서 공통으로 드러난다"며 "구술 기록은 문예진흥원 예술자료관에 보관해 열람토록 하고 인터넷 자료 서비스 및 출판 계획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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