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놀드 파머 한장상한장상(64)은 아직도 의욕이 넘친다. 동갑인 '골프계의 전설' 잭 니클로스가 최근 "내 경기력이 충분치 않다"며 은퇴를 예고했지만 '한국골프의 전설' 한장상은 당분간은 대회를 떠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오늘(17일) 시작하는 제이유오픈이 올해 3번째 출전대회이고 9월에는 창설(58년)이후 한번도 빠지지 않은 한국프로골프(PGA)선수권에 나가 전무후무의 연속출전 기록을 47년으로 늘릴 계획이다. 아놀드 파머가 올해 전통의 US 마스터즈에서 50년 연속출전을 달성한 게 그의 욕심을 더욱 부추겼다.
성적은 가끔 이븐파가 나오지만 컷오프를 통과해 본 지는 오래 됐다. "50대 중반을 넘기며 거리가 줄더니 60이 된 후 확 떨어져요. 260∼270야드 나가던 드라이버샷이 지금은 220∼230정도니까 그 동안 장비가 좋아진 걸 생각하면 50야드 이상 줄어 든 거죠."
그렇지만 후배들에게 골프라는 게 나이를 먹어도 계속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70세가 될 때까지 5∼6년은 더 하겠다는 각오이다.
내년 4월이면 골프채를 잡은 지 꼭 50년이 된다. 일본프로 출신인 고 연덕춘에게서 골프를 배워 58년 18세로 제1회 프로선수권에 출전한 후 3년만의 우승을 시작으로 이 대회 4연패(68∼71년) 포함 7회 우승을 이뤘다.
같은 해 만들어져 미국 대만 일본 선수가 휩쓸던 한국오픈에서도 64년 한국선수로 첫 우승을 차지한 후 67년까지 4연패하고, 이 대회가 아시아서키트의 하나로 성장한 뒤에도 3연패(70∼72년), 총 7회 우승을 기록했다.
76년 오란씨대회가 생기기까지 국내 대회가 2개뿐이었던 탓에 그의 국내 우승은 19회에 머물었지만 대신 선진무대인 일본에서 3차례 우승을 추가했다.
72년은 최전성기였다. 일본오픈서 점보 오자키를 누르고 우승하며 73년 US 마스터즈 출전자격을 획득하고, 딸만 넷을 두고 있다가 그 해 처음 아들을 얻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녀가 5명이나 되지만 골프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없다. 골프를 시키려고 했지만 워낙 외국으로 돌아다니는데 질린 아내가 애들한테 골퍼는 가정에 불성실한 직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줘 제대로 안 되었다고.
그는 64년 프로선수권서 처음 언더파(-6)로 8타차 우승을 한데 이어 한국오픈서도 68년 한국선수로는 처음 언더파(-7)를 기록했다. 60년대 언더파를 치는 골퍼는 한장상 뿐이었다. 167㎝의 작은 키지만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지독한 훈련과 정신력이 비결이었다.
서울컨트리(현 능동 어린이 대공원 자리) 근처에 사는 행운으로 재미삼아 포어캐디(앞에 나가 타구를 보는 사람)를 하다가 손님의 중고 골프채를 얻기 위해 캐디를 시작한 한장상은 55년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볼을 3,600개나 때린 날이 있고, 하루에 113홀을 돈 기록도 있다. 특히 아이언샷을 치면 "구질이 너무 예쁘다" "예술이다"며 동양에서 일품이라는 평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30년 전과 지금 장비의 수준차를 생각하면 그 때의 내 실력이면 지금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그는 "요즘에는 돈 많은 집 자녀들이 골프를 많이 하지만 그래도 아마추어때 한국오픈을 두 번이나 석권한 김대섭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근성을 갖고 훈련한 선수들이 성적을 잘 내는 것 같다. 지금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한 프로지망생 3명을 집중 지도 중이다"고 밝혔다.
그는 83년부터 4년간 프로골프협회장을 하면서 일본 전역의 친분있는 재일동포들로부터 지원금을 받아다가 프로 테스트를 활성화, 프로골퍼를 대폭 늘리고 대회 증설을 이루었는가 하면 88년 여자프로골프협회(JPGA)를 창설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작년 프로선수권때 최경주가 '회장님이 터를 닦아 주신 덕에 성공했다'고 해 '세계적 선수가 되니 말도 잘한다'고 받아 쳤지만 후배들이 골프계를 개척한 선배들의 고생을 알아 주면 제일 고맙죠."
그는 마지막으로 "골프가 안돼 답답한 동호인이나 자녀를 선수로 키우는 데 궁금증이 있는 학부모들이나 모두 전화(011-669-8471)를 주면 성심껏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다.
유석근 편집위원sky@hk.co.kr
■1954년 6월17일/월드컵 10여시간전 도착… 헝가리에 대패
극동지역 예선에서 일본에 1승1무를 거둬 사상 첫 월드컵 출전을 이룬 한국은 대회 개막일인 16일 밤에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전쟁을 치른 한국선수단의 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몰려온 각국 기자들은 선수들이 경기시간을 불과 10여 시간 앞두고 도착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전쟁 직후의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미리 현지에서 적응훈련을 할 수 있을 만큼 뒷받침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17일 하오3시 시작된 헝가리와의 첫 경기(사진). 헝가리는 세계 최강의 단일팀 '레드스타' 선수들이 주축이 돼 결국 이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강호였다.
김용식코치는 선수들에게 절대로 공세를 취하지 말고 수비에 치중하다가 찬스가 나면 역공을 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5분이 한계였다. 푸스카스에게 첫 골을 허용한 뒤부터는 48시간이란 긴 여행과 8시간의 시차에 따른 피로가 몰려오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전반에만 5골을 잃었다. 후반에는 황소처럼 기운이 세다는 민병대를 비롯해서 성낙운 우상권 강창기 강일갑 최정민등이 그라운드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래도 나머지 선수들이 악전고투, 종료 15분전까지 0-6으로 버티었지만 마지막에 3골을 더 허용하고 말았다.
수십개의 슛을 몸으로 막아 낸 GK 홍덕영은 헝가리 선수들의 볼이 워낙 강해 가슴과 배가 멍들었을 정도.
터키와의 2차전도 0-7로 대패한 한국은 예선탈락이 확정됨으로써 서독과의 마지막 경기를 갖지 못했다. 서독은 결승에서 헝가리를 누르고 우승했다.
■1991년 6월15일/청소년축구 남북 단일팀 아르헨 꺾어
잠실과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한차례씩 평가전을 열어 선발한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코리아팀(남북 단일팀) 선수는 양측 똑같이 9명. 여기에 임원 22명씩 더해 총 62명의 대규모 선수단이 구성됐다. 이질성 극복과 화합이라는 큰 숙제를 안고 한달간 훈련을 실시한 후 포르투갈로 떠난 코리아팀의 예선 A조 첫 상대는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성인팀은 물론 청소년팀도 79년 이 대회서 마라도나라는 신동을 앞세워 우승한 세계 정상급.
그러나 코리아팀은 경기 종료 2분전 터진 조인철의 중거리 골로 1-0의 믿어지지 않는 승리를 거두었다. 남북한을 통틀어 축구서 아르헨티나를 꺾은 것은 처음.
최고 수훈선수는 북의 조인철이었지만 남쪽의 이임생이 남미예선서 7골을 터뜨린 골게터 에스나이더를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족쇄를 채우고, 그와 더블 스토퍼를 선 이태홍도 전반 22분 골포스트를 때리는 강슛으로 경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이어 17일 아일랜드와의 2차전에서 종료 20초전 북의 최철이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1-1로 비긴 코리아팀은 3차전을 홈팀 포르투갈에 0-1로 패했으나 1승1무1패로 조2위가 돼 8강 진출의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8강에서 다시 브라질에게 1-5로 져, 83년의 4강을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앞서 세계선수권 여자단체전을 석권한 탁구의 코리아팀과는 달리 팀워크가 필수적인 축구는 훈련시간이 부족했고, 정치적 의의를 의식하느라 실력에 관계없이 선수를 남북 동수로 선발하고 주전선수의 기용마저 균형을 맞춘 경직된 운영이 단일팀의 한계였다. 결국 전력은 남이나 북의 한 팀이 출전하는 것보다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1966년 6월 15일/레슬링 장창선 스포츠사상 첫 세계제패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 이미 64년 도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바 있는 자유형 플라이급의 장창선은 처음부터 우승후보로 꼽혔다.
25세의 나이나 대표생활 8년째로 접어든 경력으로나 모두 절정기. 지금과 같은 녹다운제가 아니라 당시는 벌점으로 순위를 정하게 돼 장창선은 5회전을 끝내고 4승1무로 승률이 가장 앞서고도 벌점은 일본의 가쓰무라 야스오, 미국의 샌더스와 3점으로 같아 결국 계체량으로 순위를 가리게 됐다.
장창선은 감독의 지시로 사우나로 달려갔고, 찜통 같은 고열 사우나의 고통을 이겨낸 끝에 결국 가쓰무라보다 5g 적어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모든 종목을 통틀어 한국 국적의 선수로서 세계정상은 처음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에 이어 두번째였다. 그의 우승과 함께 올림픽 은메달 이후에도 인천 신포시장에서 콩나물장사를 계속하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뒷바라지는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고, 대한체육회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한 '유료 환영파티'로 모은 돈으로 인천에 조그만 한옥을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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