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아버지에게 삶의 터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상징이었던 과거의 잔상과는 달리 아버지께서 하루를 설계하고 살아가시는 일터였다.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시장이었다. 고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농사를 짓다가 수입이 신통치 않아 어촌으로 이주해 어부 생활을 이어 왔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조업 나갔던 아버지 어선이 전복되고 어부 두 사람이 죽는 바람에 가산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그리고 아내마저 실의와 낙담으로 병상에 누웠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이 있다.
나는 바다와 생사를 건 투쟁을 벌여야 했고, 어선이 파괴되고 어부가 죽는 불상사를 지켜보시는 아버지에게는 눈물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셨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서는 나도 많이 울었다. 자식들에게 강인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셨던 아버지가 더 측은해 보인다.
지금도 80이 넘은 나이에 섬에서 홀로 생활하시며 고기잡이하러 나가시는 모습은 왠지 불안하다. 우리 형제들 모두 가까운 곳에서 모셔야 한다고 성화지만 아버지는 "뱃놈은 바다를 먹고 살아야 한다"면서 바다에서 떠나기를 거부하신다. 마치 자신의 일을 빼앗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년 전 추석 때 성묘길에서였다. 마침 비가 쏟아져 다른 젊은 사람에게 배를 보내 주시길 원했지만 아버지는 동력선을 직접 몰고 우리를 태우러 내리(內里)로 나오셨다.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가 사시는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또 다시 바쁜 걸음을 재촉하신다. 다른 어촌 주민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가셔야 한다며 식사도 하시지 않은 채 바다로 발길을 향하신다.
이렇게 우리 부자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야만 했다. 비는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실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다. 배를 타고 가는 것도 어렵지만 나와 동생들이 떠난 뒷모습이 더 허전하게 느껴지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노를 이용해야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닷물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손수 노를 저으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젊었던 시절처럼 빨리 가지 못했다. 어느새 아버지가 연로해 노를 저으실 기운조차 부칠 정도로 힘이 약해지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일이 걱정이었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또 다시 쇠섬을 향해 노를 저어야 하는데…. "아버지 죄송합니다. 조심해서 가셔야 합니다." "걱정 마, 바닷물이 들어오면 가지…." 아버지는 힘이 부치시는 듯 바닷물이 들어오면 동력을 이용해 가겠다며 기다리시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차 조심해서 빨리 올라가라"고 하시면서 재촉하신다.
어버이 섬기는 일 지난 후면 고쳐 못한다고 한 노래가 새삼 가슴을 저민다.
/안상수 인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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