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쓰레기만두, 유가 인상… 아침에 눈을 뜨면 또 이렇게 우리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일상이 시작된다. 아주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적어도 학창시절 가슴에 품었던 꿈과 이상대로라면 우리의 하루가 이렇게 남루하지는 않을 것이다.오늘 맞이하는 현실은 호구지책에 아등바등해야 하는 척박함 뿐. 이상을 바라보는 빛나는 눈빛이 아니라, 지쳐 무뎌진 무표정이 오히려 더 익숙하다. 일상은 더 이상 화려하거나 극적이지 않으며 꿈같은 기적도 함께 하지 않는다. 단지 살아가는 것만도 벅찬 우리네 일상에서는, 꿈을 꿀 기력 조차 사치이다.
우리가 만화를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일상을 잊고 싶어서 혹은 일상과 단절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새로운 일상을 꿈 꿀 ‘사치’를 누리고 싶어서가 아닐까.
판타지는 일상을 잊고 새롭게 꿈꾸기를 소망하는 이에게 더 없는 축복이다. 세상을 압도하는 높은 이상이 있고, 그 이상을 추구하는 영웅들은 호기롭게 대륙을 종단한다. 악을 응징하는 영웅들의 무용담에는 늘 가슴 설레는 로맨스가 같이 하고, 정령들의 마법은 이 모든 스펙터클을 장식하는 ‘화룡점정’이다.
물론 판타지의 전통은 서구의 판타지 문학에서 출발했다. 가상의 대륙에 가득 감춰진 비밀, 인간과 정령이 공존하고 힘과 마법이 대결하는 세계. 이런 판타지의 전형은 J. R. R. 톨킨의 소설 ‘반지의 대왕’에 이르러 완성됐다. 판타지 문학의 진지함은 만화의 상상력과 만나 새로운 감성으로 태어난다.
만화의 키치적인 감성은 판타지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판타지가 마니아 문화에서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만화를 만나 판타지가 비로소 인간계로 내려온 셈이다.
‘아스피린’(김은정, 학산문화사)은 온전히 인간계로 내려와 꽃을 피운 판타지 만화이다. 단군, 온달, 해모수, 사방신 등 우리 고대사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캐릭터는 무책임한 꼬마 군왕이거나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혹은 아웃사이더 바람둥이 마법사 등으로 한껏 비틀어져 있다. 사방신과의 싸움도 유쾌하다. 대결의 명분이나 승부의 결과보다 독자들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은 긴장된 승부의 순간 수시로 김을 빼는 농담과 진지할 줄 모르는 악동 캐릭터들의 쿨한 표정이다.
판타지 문학의 진지함이 씻겨져 나가고 가벼운 농담과 감각적인 캐릭터로 채워진 이 만화는 가볍다는 점에서 정통 판타지 마니아들의 비판을 받을지언정,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해주기를 바라는 독자들의 바람은 오히려 훌륭히 충족시켜주고 있다. 덥다. 날씨도 덥고 돌아가는 세상사도 덥다. 한편의 유쾌한 만화를 보고 한바탕 웃을 수 있다면 더운 일상을 조금은 시원스럽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박군/만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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