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지내는 3년 동안 청와대 총리실 복지부 통일부 등 관계 기관과 협조도 잘됐고 한적 내부에서도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여러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주어 활기를 더해갔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비롯,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터키 몽골 노르웨이 등 각국 적십자사와의 협력도 더욱 긴밀해졌다.그 동안 5회에 걸쳐 남북이산가족상봉행사를 가졌고, 금강산과 평양에서 남북적십자총재회담을 열어 인도주의 지원 사업과 이산가족면회 회수 늘리기 및 면회소 설치에 합의하기도 했다. 면회소 설치는 규모에 이견이 있어 지연되고 있었는데 지난해 10월 평양을 방문한 기회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1시간 정도 면회할 때 면회소 문제를 말했더니 10일 후에 우리 제안대로 합의한다며 회담을 통보해 왔다.
재임하는 동안 큰 재해가 여러 번 있었다. 김해의 중국 민항기 추락 사고, 삼척 양양 지방의 폭우 피해, 마산 창원의 태풍피해 등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나는 현장에 나가 긴급구호에서 복구재건까지 봉사활동을 하는 적십자 봉사원들을 격려했다. 수 천명씩 참가하는 적십자봉사원대회나 청소년적십자지도자대회, 안전 및 구호요원 대회가 열릴 때마다 인도주의에 대한 열정과 적십자에 대한 사명감을 강조하면서 나 스스로 종교적 열병이 든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금 전국봉사회 곽일훈(郭一薰) 회장과 자문위원장이셨던 김영자(金玲子)씨를 비롯한 봉사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제일 어려웠던 것이 혈액 사업이었다. 우리나라는 한 해에 250만여 명이 헌혈해 500만여 유니트의 혈액을 보급하고 캄보디아 등에 기술장비도 지원하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의 혈액사업 선진국이다. 그러나 여전히 장비 기술등 역량이 부족해 더러 사고가 나 유감이었다. 지난해 전산시스템을 정비했고, 앞으로 지적 받은 사항을 개선해 나가면 많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2002년 5월 러시아의 명문 모스크바 국제관계(MGIMO)대에서 명예사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 때 이미 고백한 바와 같이 내가 어렸을 적에 깊은 영향을 받은 톨스토이의 고향 야스나야포리아나를 방문했다. 톨스토이가 청소년기와 말년에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가 말년에 산책을 하면서 "신은 곧 생명이요 사랑이다"라고 사색했던 숲길도 걸어 보았다. 그 길가에 톨스토이의 무덤이 있어 묵념을 올리니 정말 감회가 깊었다.
2003년은 내가 시작한 청소년적십자 창설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4월 5일 이 운동의 발상지 부산에서 전국 대표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가졌다. 7월에는 충북 영동에서 전국 청소년적십자단원(RCY) 대표 4,000명이 모여 큰 기념 캠프를 열었는데 여기 초청된 후안 마누엘 수아레스 델토르 국제적십자사연맹 총재가 자신이 가본 세계 적십자 행사 중 제일 성대하고 감격스러운 대회라고 했다.
잊을 수 없는 일은 2005년 10월 국제적십자사연맹 총회의 서울 유치를 성공시킨 것이다. 많은 홍보활동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난해 10월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서울 총회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181개국 적십자 대표 800여명 앞에서 인사할 때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기뻤다. 이 일이 성사되기까지에는 이세웅(李世雄) 홍소자(洪昭子) 두 부총재의 활약이 컸다.
마침 임기가 다 돼가고 있었다. 내 나이 이미 80세가 넘었고 여러 국가기관의 임원들도 많이 바뀌는 상황이어서 나의 적십자 임무는 이것으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와대와 한적 중앙위원회에 그 뜻을 전하고 12월 29일 이임식을 가졌다. 1952년부터 2년간 한적 직원이었던 아내 어귀선(魚貴善)도 그 동안 나를 따라 부녀봉사회 등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는데 어느 분이 내 이임식 축사에서 "서 총재 공로가 49%고, 부인 공로가 51%"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인연 깊었고, 젊었을 때부터 정열을 송두리째 바쳤던 한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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