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미국의 압력에 맞서 영화인들이 삭발과 거리집회로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 사수'를 외칠 때, 영화배우 문성근은 이렇게 외쳤다. "영화는 상품이 아니다. 정신이다. 따라서 스크린쿼터는 무역보호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지키려는 것이다." 이어 그는 "영원히 스크린쿼터를 하자는 건 아니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라고 했다. 대부분의 영화인들도, 시민단체도,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도 이 주장에 찬성했다. 아무도 그 40%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이제 스크린쿼터 축소를 한다고 해도 영화인들은 할말이 없다. 그래서 스크린쿼터 존재 이유의 논리적 틀을 마련했던 이창동 문화관공부 장관이 '축소'로 입장으로 선회하고, 당시 시위 주도자인 문성근 명계남은 침묵하는 걸까. 아니면 노무현 정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으니 소신을 바꾼 걸까.
한국영화의 오늘이 있기까지 스크린쿼터가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외국영화쿼터제를 해야 한다고 우스개를 할 만큼 한국영화가 '봄날'을 맞았다고 스크린쿼터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다. 1,000만명 관객시대, 세계 유명영화제 연속수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여전히 불안하고 언제 할리우드 공세에 무너질지 모른다.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다.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스크린쿼터를 지지했던 이창동 장관의 11일 말에는 그동안 경제부처에 맞서 혼자 버텨온 아픔과, 영화인 출신으로 양심과 고뇌가 엿보였다. 축소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경제부처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한국영화산업 발전을 위한 주체적 정책 판단이라는 것, 지금은 축소하지만 상황에 따라 복원 할 수 있는 연동제가 필요하다는 것, 대신 종합적 지원방안을 강구할 것이라는 배경설명과 대책이 그렇다.
그러나 이 세가지는 그의 영화동료이자,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원회 정지영 위원장의 지적처럼 "모순되거나, 실현가능성이 없거나,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다. 더구나 "한국영화산업의 활황으로 실험적 영화 등 다양성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스크린쿼터 축소 검토의 계기"라는 이 장관의 설명에는 비애조차 느껴진다. 물론 한국영화가 커질수록 상업영화만이 판을 치고, 몇몇 인간들의 배만 더 불러지고, 여전히 스태프는 굶주리는 모순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면 예술영화는 더욱 더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 장관이기에 실험영화에 대한 별도 쿼터를 두는 방안도 생각했다.
정지영 감독은 "노무현 정부, 새 장관이 될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떠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총대를 메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인으로서 자존심과 안타까움, 나름대로 대안을 고민해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누가 봐도 그래 보인다. 일방적 선언이 아닌, 영화계에서 검토해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주문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그의 선택이 주체적인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안고 있는 큰 부담중의 하나를 그가 고민 끝에 떠 맡았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 영화계를 잘 아는 사람이기에, 경제논리로 밀어 부치려는 다른 장관과 다르기에, 그의 선택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고, 영화인들을 고민스럽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노림수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나 몰라라' 하지 말라. 누구보다 소신을 갖고 '개혁'을 지지하고 실천해온 '동지'의 돌아갈 자리를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다. 영화인들 역시 무작정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이 옳을까.
/이대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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