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언론은 중요인물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기사(Obituary)를 우리보다 비중 있게 다룬다. 우리도 웬만한 사람의 죽음을 간략한 부고(訃告)로 기별하는 데 비해 중요인물은 행적을 더듬고 끼친 덕을 기린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인물과 생애에 대한 전문적 평가를 시도한다. 그런 만큼 여느 해설이나 논평보다 수준 높고 때로 철학적 경지를 넘나들어 읽기가 쉽지 않지만, 인물과 사회와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된다. 이런 까닭에 권위 언론에는 부고기사 전문가(Obituarist)가 따로 있고, 다양한 분야와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이들은 독자적 권위를 지닌다.■ 영국 미국 호주 등 영어권 부고기사 전문가들은 국제협회까지 만들어 정기모임을 갖고 직업 윤리와 기사 스타일 등을 토론한다고 한다. 여기에 역사연구를 위해 부고기사를 탐구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부고기사는 이미 1663년 영국신문 더 뉴스(The Newes)에 등장한다. 첫 부고기사는 크롬웰 혁명 때 런던타워에 갇혔던 왕당파 법관이 뒷날 81세로 죽자 국왕 찰스 2세의 신문감독관, 요즘 국정홍보처장이 썼다. 충신을 기리는 행장(行狀)답게, "빼어난 애국자인 고인은 죽음에 임해서도 국왕폐하와 국법에 대한 충성과 순종을 후세에 유언으로 남겼다"는 칭송으로 일관한다.
■ 물론 국왕 아닌 대중을 상대로 쓰는 오늘날 부고기사는 크게 다르다. 특히 세계 최고수준으로 공인된 영국쪽은 고인에 대한 헌사는 없이 냉정하고 진솔한 평가를 내린다. 부음기사가 비록 죽음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생전의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란 인식이 바탕이다. 이에 비해 미국쪽은 옛 관행을 좇아 죽은 자에 대한 칭송에 너그러운 편이다. 이 때문에 미국쪽 전문가들은 영국을 부러워한다는 얘기다. 중요인물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피하다 보니, 조깅하다 죽은 조깅 예찬론자 등의 가십성 또는 느와르(noir) 취향 부고기사를 즐겨 쓰게 된다는 것이다.
■ 영어권의 내로라하는 부고기사 전문가 수십명이 공교롭게도 지난주 미국 뉴멕시코에서 열린 국제협회 세미나에 모였다가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고를 동시에 들었다. 순간 일제히 비명까지 지르며 황급히 뛰쳐나가 전화를 거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으며, 더러는 즐거운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부고기사를 써 놓고 몇 년째 기다리는 부담을 벗은 때문이다. 그 레이건 부고기사는 영미 언론의 차이를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다. 미국쪽이 칭송 일색인 반면, 영국쪽은 고인의 과오와 허상까지 객관적으로 되짚었다. 우리 언론도 참고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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