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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 속으로]성균관 '세습 守僕' 이정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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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 속으로]성균관 '세습 守僕' 이정우씨

입력
2004.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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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은 한자로 ‘守僕’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묘(廟), 사(社), 능(陵), 원(圓), 서원(書院) 등에서 제사에 관한 일이나 청소 등을 맡아보던 사람이다.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에도 수복이 있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聖殿)과 강의동인 명륜당(明倫堂), 기숙사인 동.서재(東.西齋) 등 많은 건물이 있어 이들을 관리하고, 제향(祭享)을 돕고, 학교에서 기식하는 학생들의 수발을 드는 이들이 필요했다. 수복은 이 같은 성균관의 잡역을 세습적으로 맡아 해오던 일꾼이다. 굳이 말하자면 종복(從僕)의 신분에 가깝다.

그런데 이게 단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 서울 한복판 성균관에 여전히 세습 수복이 있다. 이정우(李楨雨.72)씨는 250여년 동안 같은 일을 하며 이 곳을 지켜온 집안의 손이다. 물론 지금이야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어 강요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들 욱(旭.39)씨도 몇년 전부터 성균관에 들어와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다. 성균관 세습수복 집안은 그렇게 또 한 대를 더 이었다.

담장 하나 사이로 성균관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사람과 차량들로 번잡한 성균관대학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돌연 분위기가 바뀐다. 단 한 채 현대식 건물인 유림회관을 지나 몇 걸음 떼지도 않아서 세월은 훌쩍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래 묵었으나 정갈한 고옥(古屋)들의 기와 지붕 위로, 그보다 더 오래 됐음직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짙은 녹음을 드리웠다. 늦은 여름 오후의 성균관 뜰은 산책객도 뜸해 한가롭고도 고적했다.

반색하며 맞은 이씨(예전 초년기자 때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다)가 살림집 툇마루로 안내했다. 남향으로 앞뒤 나란히 앉은 대성전과 명륜당 동편의 동재(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성균관대 유학대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인다) 너머 옛 식당 건물이다. 성균관 학생들이 대개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生員), 진사(進士)들이라 ‘진사식당’으로 불렸다.

지금은 여러 방이 취학 전 어린이 교육장으로 쓰이는 이 ‘ㅁ’자 한옥 한 켠이 이정우씨가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살아온 곳이다. 원래는 성균관 울타리 안 다른 곳에 이씨가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가 대대로 살아오던 집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돼 이리로 옮겨왔다. 이씨의 본적, 주소는 그래서 모두 서울 종로구 명륜동3가 53번지다.

그의 집안이 성균관과 인연을 맺었다는 250년 전이라면 영.정조(英.正祖) 시대쯤 될까? “정확히 자료가 남아있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께 그렇게 들었고, 아버지는 또 할아버지한테 얘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고….” 아무래도 반가(班家)는 아니었을 테니 그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씨보다 더 오래된, 무려 15대에 걸친(1대를 30년만 잡아도 450년이다) 수복 집안이 있었다. 헌데 그 집 아들은 성균관대학의 일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어 지금은 이씨 만이 수복 집안의 대를 잇고 있다. “이 안에서 자라면서 아버지 일을 돕다 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하게 됐을 뿐입니다. 배운 것도 없고….”

제대한 직후(이씨는 한국전쟁 중 입대해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국가유공자다) 돈을 벌겠다고 잠깐 마장동 우시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허드렛일을 했어도 늘 마음 속에 성현들을 모시고 유림들의 엄정한 예의범절을 보며 자라온 그에게 악다구니 같은 세속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 끝나면 다들 도박들을 하고 술 마시는 험한 분위기였지요. 잘못 휩쓸리다간 도둑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미련 없이 다시 성균관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연로해지신 30대 때부터(아버지는 그가 마흔 한살 때 74세로 돌아가셨다) 수복 일은 온전히 이씨와 아내 김인겸(金仁謙.68)씨의 몫이 됐다.

단순한 육체노동이긴 해도 수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1만평이 넘는 성균관 경내의 모든 건축물과 뜰을 세심히 살펴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다, 유림이나 학생들의 끼니를 챙기는 등 온갖 수발도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성균관의 가장 큰 행사인 매년 춘추(春秋) 두 차례 석존대제(釋尊大祭) 때는 그 많은 음식과 술, 제기, 식기들을 준비해야 하고, 매달 초하루, 보름의 정기분향 때는 물론이거니와 수시로 전국 각지에서 찾아 드는 참배객들의 안내도 맡아야 한다. 건강한 몸에다 성정이 진실하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아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씨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바로 그런 분이었다.

“제가 열 여덟 때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다 피난을 떠나고 대포 소리,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오는 급박한 상황이었어요.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제기들을 일일이 챙겨서는 마당 깊은 우물 속에다 집어넣었습니다. 공자님을 모시는 소중한 물건들을 그냥 놓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전부가 놋쇠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한 트럭분이나 되는 그 많은 걸 밤새 다 숨기고서야 간신히 피난을 떠났습니다.” 이듬해 수복(이건 收復이다)된 서울에 돌아와 우물 속에서 그 제기들을 건져냈다. "새까맣게 슨 녹을 닦아내 반짝반짝 제 빛을 되찾은 제기들을 제 자리에 옮기니까 정말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일로 훗날 정부 표창을 받았다.

이씨가 본격적으로 일을 떠맡으면서 가장 고생한 일은 땔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돈 안 되는' 성균관 살림이란 게 뻔했을 터이니) 칼바람 몰아치는 캄캄한 겨울 새벽마다 리어카를 끌고 뒷문을 통해 성균관대로 올라갔다.

그곳 조개탄을 몰래 퍼와서는 유림과 학생들이 묵는 방을 데우고 밥을 지었다. 최근덕(崔根德) 현 성균관장도 이 곳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런 이씨의 고생을 안쓰럽게 지켜 본 사람이다. 아무리 물려받은 천직이라곤 하나 나 어린 학생들의 수발을 드는 일이 못마땅하지는 않았을까. "에이,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자님 잘 모시고 그분들 어려운 공부 잘하도록 보살펴드리는 게 제 일이니까요."

마냥 성실하고 우직한 그를 눈 여겨본 안양의 유림이 넌지시 손녀와의 혼례를 권했다. “옛날 같으면 배필로 맞을 수 없는 양가집 딸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저를 워낙 좋게 보신 거지요. 시집 와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여전히 고운 태가 남아있는 아내 김씨가 수줍게 얘기를 거들었다.

“석존대제는 열흘 전부터 준비해요. 쌀을 가마니로 풀어 열다섯 독 술을 담그고 돼지 한마리, 소고기 100근 등으로 온갖 음식과 국, 밥 따위를 장만해요. 육포는 반드시 한옥지붕에 올려 볕에 닷새 이상 말려야 하고…. 그 외에도 평소 너무 일이 많아 결혼 마흔 여섯해 동안 바깥 출입 한번 제대로 못해 봤어요. 이 양반은 그래도 가끔 등산, 낚시도 다니고, 동네 산책도 나가는데…."

그렇게 쉴 틈 없이 몸을 놀려도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만 받았다. 그래도 아들 셋 중 둘을 번듯하게 대학 공부시켜 내보냈다. 십여년 전부터는 유림회관 내 식당운영을 맡았다. 넉넉하진 않아도 전쟁 유공자로 받는 연금에 월 70만원 남짓한 봉급, 식당수입 등으로 전보다는 한결 사정이 나아졌다.

이씨는 이제 기운이 많이 떨어져 주로 아내가 일을 한다. 제사와 내방객들을 돕는 일은 밖의 일이 뜻대로 안돼 3년 전 ‘고향'으로 돌아 온 막내아들(39)에게 맡기고 있다.

“언젠가는 수복 집안의 대가 끊기겠지요. 하지만 그 동안 공자님 덕에 큰 우환 없이 잘 살았습니다. 전통을 지켜오는데 작은 힘이 됐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기우는 햇빛에 이씨 얼굴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으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고 웃음소리는 호탕했다. 힘들었어도 올곧게 살아온 삶에 대한 당당한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이정우씨 내외는 경내를 두루 안내하면서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건물의 기와, 기둥서부터 마당의 꽃 한 송이, 풀잎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도 예사로이 지나치지 않았다. "가끔 젊은이들이 경건한 이 곳에 들어와 진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게 못마땅해도 모질게 나무라지는 못합니다. 홧김에 아무거나 걷어차 상하게할까 봐서요.” 그늘이 100평을 넘는다는 대성전 앞 은행나무 거목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마치 자식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일하면서 언뜻언뜻 장지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강의소리를 듣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그 가르침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겸손하고 남 잘되는 것 내 일처럼 좋아하고, 옳지않은 데 눈 돌리지 않고…. 너무나 고맙고 행복한 일이지요.”

그러니 한낱 부질없는 신분 따위나, 혹은 글 몇줄 더 읽었음을 함부로 내세우지 말지니. 누가 그만큼 제대로 공부를 하고, 또한 배움을 진솔하게 실행했으랴.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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