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58)씨가 연작 장편 '빈 방'을 출간했다. 그는 올 초 창작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하고, 13년간 맡았던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직을 그만뒀다. 그리고는 박경리씨가 있는 강원 원주의 토지문학관에 들어가 소설과 씨름해 왔다.10일 만난 박씨에게 심정을 물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고심하다가 나 자신에게 타협안을 내놓았다. 지금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1년에 연재소설 하나가 어딘가. 올해는 다른 마음 갖지 않고 흘러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다." 만류하던 아내에게 신혼을 기억해보라고 설득했다. 단칸셋방에서 시작했으니 혹 그렇게 매듭짓는다 해도 그동안 "잘 먹고 잘 산" 것으로 밑진 인생은 아니지 않느냐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가 직업이 되니까 작가라는 이름이 울고 있더라. 나는 언제나 문학에 대해 쓸쓸하면서도 열렬한 마음을 품어 왔다. 말년에 좋은 소설 하나를 남기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빈 방'(이룸 발행·9,000원) 은 다시 전업작가가 된 박범신씨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 책이다. 그는 1998년 단편 '별똥별'을 발표했고, 6년에 걸쳐 '별똥별' 연작 5편을 썼다. "나는 계속 이 연작소설의 큰 주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고 고백한다. 그 주제는 다름 아닌 '불임의 문제'다.
그림에 대한 열정도 없고 사랑에 대한 믿음도, 인생에 대한 기대도 없는 화가가 있다. 화가의 연인 혜인은 그러나 반대로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아이를 갖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찬 여자다.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 살아가다 보면 생명력 넘치는 창조적 생산력은 거세 당한다. 욕망을 따라가는 헛배 부른 삶은 살겠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보편적 초상이 아닌가. 불임의 삶 말이다."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겠다며 돈 많은 예순 네 살 남자와 결혼하려는 혜인('빈 방')과, 죽음에 임박해 은행통장과 토지문서를 찾아 움켜쥐는 용암사 원행스님('감자꽃 필 때') 등은 허깨비 욕망에 붙들려 질주하는 인생이다. 연작의 화자인 화가는 그와 같은 삶에 회의를 갖고 있지만, 자본주의 경쟁에서 탈락해 떠도는 삶이다.
연작에서 구원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감자꽃 필 때'의 벙어리 농부다. 일흔 일곱 살의 농부는 한국전쟁 때 부인을 잃고 말도 함께 잃었다. 서두르는 법이 없고 언제나 환하게 웃는 이 농부가 어느날 입을 여는 것을 화자는 본다. 죽은 아내의 사진을 놓고 음식을 권하면서 "오, 늘, 임, 자, 귀, 빠, 진, 날, 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평생을 땀 흘리며 농사지어온 이 사람은 이 쓸쓸한 연작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인물이다. 박범신씨는 농부에 대해 "비정한 자본주의 논리를 극복한 것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내 머리 속, 관념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한다"고 털어놓았다. 현실에서의 소망은 아직 찾아지지 못했다는 의미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박씨는 "소설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떠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고 답했다. "소설은 결국 유장하고 객관적인 서사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이나 내후년쯤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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