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국내 흥행 기록을 잇따라 새로 쓰고, 중요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국제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영화계와 관객이 뿌듯한 자신감을 느낄 만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영화의 성공이 대단히 독특한 구조에 기반하고 있고, 구성과 서사에서 국제기준과 동떨어져 있어 자칫 우리끼리의 잔치로 끝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상명대 영화학과 조희문(趙熙文) 부교수를 만나 우려 섞인 진단을 들어 보았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높은 때가 있었나.
"지금은 한국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하고, 열정이 넘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폭발기는 앞서 두 번이 더 있었다. 1920년대 후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영화운동이 굉장히 활발했다. 1940년의 '조선영화령' 등 일제의 통제로 주춤했지만 해방 후 '영화건설본부'와 '영화동맹'을 축으로 영화를 매개로 한 치열한 좌우이념 대결이 벌어졌다. 과거의 두 차례의 관심 폭발이 이념 지향적 성격을 띠었다면 지금은 그와 함께 산업적 성격도 강해졌다."
―'이념 지향'이란 말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를 염두에 둔 것인가.
"우선은 그렇지만 영화 자체도 마찬가지다. 99년 영화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영화법 개정으로 영화진흥공사가 영진위로 이름과 체제가 바뀌었다. 이를 전후한 영화계의 내분은 겉으로는 세대 갈등이었지만 내용으로는 영화를 '운동'으로 보는 쪽과 영화를 산업·문화로 보는 쪽의 이념 갈등이었다. 이 싸움에서 진보 세력이 영진위 주도권을 잡은 후 영진위는 영화진흥 역할보다 영화를 통한 사회 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또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이념 지향적' 영화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쨌든 '쉬리'에서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르는 한국영화 부활은 영진위 출범 이후의 일 아닌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영진위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영화 '쉬리'의 의미를 평가한다면.
"'쉬리'는 우리 관객을 해방시켰다. '쉬리' 이후 우리 관객은 비로소 진정한 자기 권리 주장을 하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관객은 평론가나 대중매체의 안내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사 홍보 담당자들이 평론가들에게 '제발 별 많이 주지 마세요'라고 부탁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평론가들의 칭찬은 영화가 어렵고 재미없다는 표시쯤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관객의 자기 판단, 자기 선택이 강해졌다. '쉬리'는 다른 벽도 허물었다. '쉬리' 이전에도 한국영화가 자신감을 가질 계기는 있었다. 80년대 강수연이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적어도 한국영화가 저급한 수준은 아니라는 인식이 싹텄다. 90년대 들어 '장군의 아들' '서편제' '투캅스' '테러리스트' 등이 단발적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영화에 대한 열등감, 산업·흥행 측면의 경쟁력 열세는 여전했는데 '쉬리'가 그 벽을 돌파했다."
―영화산업이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는 얘긴가.
"그렇지는 않다. 대단히 기반이 불안정하다. '쉬리'는 처음 많아야 20만∼30만 명의 관객이 들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서울 관객 기준으로 '타이태닉'이 180만 명이었다. 영화사로서는 50만 명이면 대단한 기록이고 100만 명을 넘으면 환상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 관객이 30만 명을 넘자 '50만 명 정도?' 하는 예측이 나왔고, 100만 명을 넘자 '한국영화 사상 최고 흥행'이라는 딱지와 함께 '쥬라기 공원', '타이태닉'이 잇따라 목표로 설정됐다. 이때부터 '숫자의 마력'이 작용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거기에 취했다. '쉬리' 열풍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다시 'JSA'가 '쉬리'의 기록을 깼다. 사람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친구'가 또 기록을 깼다. 그 사이 '엽기적인 그녀', '두사부일체' 등 전국 관객 500만 명이 넘는 영화가 나와 '쉬리'와 'JSA'의 성공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더니 '친구'가 8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자 당장 1,000만 명 돌파가 언론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그것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로 실현됐다. 1,000만 명이란 숫자는 비현실적이다. '실미도'나 '태극기…'는 '15세 관람가' 등급이었다. 15세 미만, 65세 이상의 노령층 등을 뺀 잠재 관객은 1,500만∼2,000만 명이다. 그런데 1,000만 명이 봤다. 한국의 문화현상에서 둘 중 하나가 참여하는 사건이 있었나. 불가능한 숫자다. 이런 점에서 1,000만 명은 절대 안정적 숫자가 아니며 이를 전제하고 영화를 제작한다면 큰 착각이다."
―지나친 우려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한국영화는 우리 기질과 닿아 있다. 월드컵 축구대회 때 처음 '붉은 악마'는 광화문 전광판 앞에 축구팬 중심으로 모였다. 넓은 곳에서 함께 모여서 경기를 보자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것이 집단화, 매스컴과 열광을 주고 받으며 전국적 응원물결로 폭발했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어느 단계에서는 '붉은 악마' 대열에 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마저 생겼다. '쉬리'의 관객도 '붉은 악마' 대열과 비슷하다. 그것이 '친구' '실미도' '태극기…'로 이어졌다. 더욱이 '친구' 이후로는 영화가 관객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위협했다. '아직 그 영화 안 봤냐?'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문화현상에서 소외된다는 위기감, '왕따' 당할 수 있다는 잠재적 공포가 작용했다. 월드컵 4강 신화가 한국축구의 실력과 동떨어져 있듯 영화 흥행기록은 제작과 유통, 영화적 설정을 통한 것이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방향을 잃은 집단성의 폭발이다. 0대세를 좇아 폭발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영화가 대상이 됐을 뿐이다. 관객 1,000만 명 시대에 야구장과 축구장, 도서관과 음악회장은 텅텅 빈다. 문화적 바탕의 성숙과는 거리가 있다."
―장기적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한국영화는 관객의 집단성을 흥행성공의 큰 요소로 삼았다. 최근의 한국영화는 공격성과 속도 등 '난폭함'을 무기로 삼고 있다. 소재나 내용도 그렇지만 기술적으로도 화면의 최소 단위인 쇼트(컷) 수를 늘려 빠른 화면전환을 시도했다. 보통 두 시간 짜리 영화가 800개 정도의 쇼트를 갖는다. 그런데 1시간 40∼50분 짜리 영화에 쇼트가 1,000∼1,200개, 많을 때는 1,500개나 되니 엄청난 속도감을 준다. 관객이 느릿한 진행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재도 공격적이다. '바람난 가족'은 가족을 깨부수었고, '친구' 이후 폭력과 욕설이 도를 넘었다. '실미도'나 '태극기…'는 국가권력과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전복했다. 공포와 폭력, 이념, 성 등 모든 면에서 금기와 장벽을 깨고 있다. 국내 관객의 기질에 맞춘 이런 거친 영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부분적 호소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주류시장에서의 유통에는 치명적 한계가 있다. 이런 공격성, 난폭함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경우 국내 관객이 호응하지 않으리란 점에서 영화계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한국영화의 기반 안정에 스크린쿼터제는 필요한 장치인가.
"그것이 한국영화 보호·진흥이라는 당초 목표에 제대로 기여했나, 또 그랬더라도 한국영화의 자본과 기술, 인력, 유통망 등이 갖춰지고 시장에서의 자생력을 가진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가를 나눠서 봐야 한다. 애초에 스크린쿼터제의 실상은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제작사에 외국영화 수입권을 주다 보니 영화사는 흥행이 되는 외국영화 수입에 힘을 기울였다. 외국영화 수입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제작한 부실한 한국영화 상영의 피해는 극장이 떠 안았다. 상영의무일수대로 걸려도 관객이 보지 않으면 한국영화 진흥에는 효과가 없다는 점, 관객과 극장, 영화사가 함께 살아야 영화산업이 산다는 사실을 잊고 공급 차원에 눈길을 고정시킨 정책적 무지의 결과였다. 한국영화 상영일수가 오히려 줄어들었는데도 영화사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85년 UIP 직배 논란, 86년 개정 영화법 시행으로 영화사가 독점적 외화 수입권을 잃으면서 비로소 민감한 문제가 됐다. 그러나 88년 영화시장 개방 이후 99년 '쉬리'에 이르기까지 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싹터 국내 영화산업에 '기획'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등 체질이 바뀌었고, 그것이 '쉬리' 이후의 흥행 성공을 불렀다. 과거에도 이랬는데 한국영화의 자생력이 갖춰져 극장이 앞장서서 한국영화를 걸고 있는 지금은 스크린쿼터제는 더욱 의미가 없다. 현재 스크린쿼터제는 관련 운동단체를 존속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다. 또 애초에 한국영화 보호·진흥을 위한 여러 방안 중의 하나로 등장한 스크린쿼터제가 99년 이후 영화운동의 목표인 것처럼 바뀌었고 이제는 아예 문화적 자주성과 다양성을 지키자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변질했다. 문화적 다양성, 한국영화와 관객의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외국영화를 보호해야 할 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궁극적으로 영화산업은 외적인 구호를 벗겨내고 시장 경쟁력에 맡겨야 한다."
황영식 편집위원 yshwang@hk.co.kr
●조희문 교수 약력
1956년 경북 상주, 48세 한양대 연극영화과 경인일보 기자, 문화부장, 논설위원 중앙대 영화학 박사 상명대 영화학과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예술대학장) 저서 '나운규' '김성호' '한국영화 쟁점1' '현대영화이론'(번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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