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라는 민감한 정책현안을 둘러싸고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이 9일 민주노동당 의원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당이 내 뜻을 잘 몰랐다"며 여당에 공개 면박을 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과연 당·청과 당·정간 의견조율 시스템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와 비난이 고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분양원가 공개문제를 둘러싼 당정 혼선은 그야말로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 과정을 뜯어보면 당과 정부, 당과 청와대 간의 의사소통부재가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당 정책위 관계자는 10일 "공약을 만들 때 해당 부처와 청와대와도 협의를 했다"며 "당시 대세가 원가공개 쪽이었고 경실련 등 시민단체의 압력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부는 1일 당정협의에서 원가연동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키로 방향을 틀어 원가공개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이와 관련, 당 정책위측은 "그때 건교부 장관은 '원가공개는 어렵다'는 노 대통령의 심중을 알고 원가연동제를 강하게 밀어부친 것 같다"며 "당으로서는 그 내막을 몰랐지만 새 정책라인이 정부측이 워낙 강하게 나오니 이를 받아 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당 지도부가 청와대의 기류변화를 전혀 몰랐다는 얘기다.
이어 시민단체 등이 "개혁의 후퇴"라며 들고 일어서자 3일 당 지도부는 "총선 공약을 합리적 이유나 절차 없이 바꿀 수 없다"며 원가공개 방침을 재확인했다. 이러던 차에 노 대통령이 9일 "당이 내 소신을 모르고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다"며 "분양원가 공개가 개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당을 힐난한 데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도 당과 청와대의 조율이 전혀 없었다는 반증이다.
이에 따라 우리당에는 당혹감과 함께 당정관계에 대한 자성론이 일고 있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이날 "당정간 의견차이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고 자위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천 대표는 "논의가 설익은 채로 공개된 측면이 있다"고 혼선을 시인 한 뒤 "앞으로 긴밀한 당정협의에서 잘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금의 난맥상을 극복할 지에 대한 청사진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와 함께 김형주 의원은 "중요한 정책 사안에 대해 당내에 밀도 있는 논의가 없었던 게 1차적 문제"라며 "당 정책위를 활성화 하는 게 급선무이고, 당이 먼저 적극성을 갖고 주도적으로 정부와 협의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정보교류 등 당·정협의 시스템의 강화를 주문했다. 동시에 대통령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다."대통령 생각이 그렇다고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채널을 통해서든 그 같은 정부 입장을 당에 먼저 전달했어야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盧대통령, 怒했나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에 대해 무슨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노 대통령이 9일 민주노동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열린우리당은 내 소신을 모르고 총선 때 분양 원가 공개를 공약했다"며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자 당청(黨靑) 간에 갈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여당 입장을 반박하는 경우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노 대통령이 야당과의 모임에서 제 식구 입장을 반박했기 때문에 구구한 해석이 따르고 있다.
노 대통령은 4일 우리당 지도부와의 회동에서 '당정분리론'을 강조하면서 "당도 청와대 운영에 대한 간섭을 자제해주기 바란다"고 뼈있는 말을 했다. 이 같은 흐름으로 볼 때 당청 간에 이상 기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청와대측은 갈등설을 부인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민노당이 먼저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 공약 후퇴 움직임을 비판하자 대통령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을 뿐"이라며 "당청 간 갈등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4·15 총선 이후 여권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우선 노 대통령이 자신은 '당정 분리'라는 새 틀로 접근하려는데 당은 필요할 때만 청와대에 기대려는 구시대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또 당초 김혁규 의원을 새 총리로 지명하려던 과정에서 여당 소장파 인사들이 제동을 걸고 당권파가 이 문제를 조기에 정리해주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여당의 일부 중진들이 입각 경쟁을 벌이는 등 논공행상에 치중했다고 판단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대권주자들의 입각 문제 정리 과정에서 조기 개각 무산 파동이 터졌기 때문이다. 또 여당 일부 의원들이 확정된 정부 정책을 제대로 밀어주지 않는 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이번에 비(非)당권파인 이해찬 의원을 총리 후보로 지명한 것은 현행 당 지도부를 견제하고 당내 세력 균형을 유도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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