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 해안을 끼고 도시가 형성돼 물류가 잘 발달된 곳.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는 그런 이점을 안고 한국에서 진출한 기업이 5,000곳이 넘는 '차이나 드림'의 도시다. 하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적지않게 깔려 있다.투자 승인 보름 만에 퇴거 명령
칭다오시 도심 북쪽 이창(李滄)구 한 경제 개발구 공장을 막 임대한 J사 박모(51) 사장. 지난 4일 오후 공장을 찾았을 때 현지 직원들과 함께 내부 인테리어 공사에 땀을 비오듯 쏟아내는 중이었다.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때문인지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중국이란 곳이 이런 곳이구나 뼈 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전 공장에서 투자 승인을 받은 지 불과 보름 정도 만에 퇴거 명령을 받았으니까요."
서울에서 안정적인 사업을 하던 박 사장이 칭다오에 진출한 것은 3월초. 형틀 이형제라는 건축용 화학제품을 생산해 국내에 역수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렴한 인건비도 매력적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중국 내수 시장도 공략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1개월 여간의 부지 물색 끝에 지방 관료 소개로 자리를 잡은 곳은 이창구 동쪽 인근의 한 지방 개발구. 4월말 투자 승인을 받고 1년 임대 계약을 체결했지만 보름도 채 안된 지난달 5일, 갑작스레 정부측으로부터 퇴거명령 통지를 받았다. "개발구 정리 일환으로 임대공장 부지가 도시 계획으로 헐리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80여곳에 달하는 입주 업체들은 단체 행동도 불사하겠다고 나섰지만, 정부의 지침이 내려진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현지 실정을 제대로 모르고 무작정 진출한 것이 화근이었죠. 상당한 손실을 입은 마당에 철수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박 사장은 잠시 놓았던 일손을 다시 재촉했다.
노동집약적 산업은 "NO"
칭다오 도심 근처에 자리잡은 칭다오한일합섬방직유한공사. 10년 전인 1995년 1만5,000평 부지에 아크릴 원사 생산공장을 세워 한국 기업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 온 이 기업은 한 때 '잘 나가던 기업'이었지만, 최근 몇 년 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수출 경기가 좋지 않은데다 원자재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죠. 게다가 방직 산업은 인건비 경쟁이 핵심인데 외곽의 값 싼 노동력을 무기로 압박해 오는 중국 현지 업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이 회사 김차병 총경리(사장)는 더 이상 중국이 '기회의 땅'만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지난 3월에는 1,000명 가량의 직원 중 230명을 정리했고, 생산 라인도 3만2,000추에서 2만4,000추로 대폭 줄였다. 적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김 총경리는 "인건비가 싼 것은 사실이지만 5대 사회보험금 부담을 감안할 때 추가 부담이 적지 않은데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인력의 질도 많이 떨어진다"며 "비용 개념의 투자는 해외 진출의 가장 원시적 형태"라고 했다. 최근 들어 중국 현지 업체들의 숙련 인력 빼가기가 극성을 부리지만 속수무책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비용 절감 만을 노리고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잃는 순간 더 싼 지역을 찾아 외곽으로, 또 제3국으로 옮기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영세 업체는 중국 정부로부터도 더 이상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업종이나 규모에 특별한 제약은 없다"는 것이 칭다오시정부 대외무역경제합작국 순헝친(孫恒勤) 부국장의 얘기이지만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KOTRA 칭다오무역관 손수윤 차장은 "처음에는 봉제공장 하나만 들어와도 시장이 직접 나와 환영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며 "당국자들이 목을 뻣뻣이 세우고 업종을 골라 받고, 돈이 안되는 업체는 외곽으로 이전시키려 한다"고 했다.
거대 시장 공략 아직 요원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5,000곳이 넘지만 이중 20%에 달하는 1,000곳 가량은 영세한 액세서리나 공예품 업체들이다. 국내 등에서 원료를 수입해 가공한 뒤 제3국으로 전량 수출하는 단순 재가공 업체들이다. 13억의 거대 소비 시장을 배후에 둔 중국이라지만 기술력을 갖춘 몇몇 대기업을 제외한다면 진정한 내수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 기껏 내수 업체라 해도 소비재가 아니라 수출 업체 등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중소기업들에게 내수 시장 공략은 말처럼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한 방직업체 사장은 "솔직히 기술력도 자본력도 없는 기업이 거대한 중국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며 "설사 처음엔 잘 나간다 해도 곧 정부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고 중국 업체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어 훼방을 놓는 것이 이곳의 무서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칭다오=이영태기자
ytlee@hk.co.kr
■'5대 보험'포함땐 인건비 만만찮아/회사부담액, 월급의 2배 되기도
아직까지 중국의 인건비 수준은 매우 저렴한 편이다. 대도시 지역 단순 생산직 근로자의 경우 임금 수준은 통상 월 800∼1,000위안. 우리 돈으로 12만∼15만원 정도다. 우리나라의 2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물류 등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외곽 지역으로 가면 월 500 위안짜리 저임금 노동자를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국 인구의 60%에 달하는 농촌 인력을 중심으로 매년 700만∼900만명의 엄청난 신규 노동력이 공급되는 것을 감안하면, 당분간 저임금 체제가 쉽게 붕괴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현지에 진출한 업체들 중 상당수는 "중국의 인건비가 생각만큼 그렇게 싼 것만은 아니다"고 말한다. 다소 엄살이 섞인 것이기도 하지만, 기업들의 체감 인건비가 단순 임금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근로자들에 대한 회사의 사회보험금 부담이 만만치 않다. 양로보험 등 5대 사회보험 부담금이 근로자 임금의 50%에서 많게는 100%에 달한다.
실제 직원들이 손에 쥐는 것은 월 1,000위안에 불과하지만, 회사가 부담하는 금액은 2,000위안까지 치솟는다는 얘기다. 중국 정부는 점차 사회 보험을 강화하는 추세다.
"저렴한 노동력을 원하는 만큼 공급해 주겠다"는 입주 당시 관료들의 입 발린 소리도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된다.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인력 조달은 전적으로 회사의 몫. 명절에 고향에 가서 함흥차사가 된 직원, 웃돈 10∼20 위안에 훌쩍 다른 회사로 옮겨버리는 직원들에 뒤통수를 맞는 일이 다반사다.
더 큰 골칫거리는 낮은 인력의 질이다. 한 업체 사장은 "처음에 100명 정도를 고용할 생각이었다면 통상 130∼140명 쯤은 채용해야 공장을 돌릴 수 있다"고 했다. 인건비 부담이 30∼40%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숙련된 기술자의 '몸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지퍼 제품을 생산하는 칭다오 YBS지퍼 안정찬 총경리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연수를 시킨 뒤 월 2,000위안에 채용한 한 기술자가 어느날 10배가 넘는 월급을 요구해왔다"며 "거절을 했더니 곧 바로 기술 자료를 빼내 다른 현지 업체로 자리를 옮긴 일도 있었다"고 했다.
/칭다오=이영태기자
협찬: 삼성전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