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총선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표로 재임한 5∼6개월 간 민주당 주도로 국회에서 했던 일 가운데 기억 나는 것으로는 외환위기 등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극빈층의 생활안정을 위해 1인당 23만원의 최저생계비를 지원해주는 기초생활보장법의 통과, 지식산업과 벤처기업의 적극 육성 등을 들 수 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의약분업이었다. 의약분업은 2000년 7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약분업 실시안이 발표되자 처방료 조제료 현실화, 약사의 임의조제방지, 전문의약품 확대 문제 등을 놓고 의사 병원협회 등의 반발과 비판 여론이 거세 정부와 여당이 곤혹스러웠고 정부의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4월초 박지원(朴智元) 청와대 정책수석이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자고 해 나갔더니 "머지 않아 남북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당 출입 기자들한테 귀띔을 해 놓으십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그거 확실한 거요"하고 물으니 "베이징(北京)에서 예비접촉이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 수석 자신이 갔다 온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출입기자들을 내 방으로 불러 넌지시 알려줬더니 보도가 됐다. 약 두 달 후인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나는 차츰 당을 떠나고 국회의원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8월 전당대회를 기해 사표를 낼 마음을 먹고 한광옥(韓光玉)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사의를 표시했더니, 김대중(金大中)대통령께서는 "아직은 때가 아니고, 지금은 서 대표가 있어야 되겠다"고 만류했다. 사실 나는 그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임기가 7월에 만료되기 때문에 그 후임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 12명을 뽑았다. 김 대통령은 대야관계나 정국운영을 최고위원들이 책임을 지고 잘 해달라고 했다. 그런 가운데 한빛은행 부정대출사건과 옷로비사건, 박지원씨의 한빛은행 배후연관설 등으로 여야관계가 어려웠다. 소장파 쪽에서 당 운영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고, 특히 소위 실세라고 불리는 권노갑(權魯甲) 의원측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노골적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나는 청와대 주례회동 때마다 30분 일찍 가서 대통령과 독대를 하며 당의 사정에 대한 보고를 했는데 "소장파들의 저항으로 그냥 넘어가기 어려워 현 당직자들은 일단 후퇴를 해야겠으니 나를 포함해서 모두 경질해달라"고 했지만 실현되지 않고 계속 지연됐다.
10월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발표됐다. 나는 최고위원, 당직자들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축하를 해드렸다. 김 대통령은 사실 자신도 발표 전날까지 수상 소식 몰랐다면서 민주화 투쟁 당시의 고난을 회고하는데, 감개가 어려 목소리가 떨렸고 나도 들으면서 눈물이 어렸다.
12월2일 김 대통령 주재로 최고위원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최고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솔직한 의견을 이야기했다. 김근태(金槿泰) 박상천(朴相千) 정대철(鄭大哲) 의원 등은 "지금 이대로 갈 수 없다. 당정 쇄신을 해 새롭게 출발하자"고 했고 김중권(金重權) 신낙균(申樂均) 한화갑(韓和甲) 이인제(李仁濟) 의원 등은 "지금 이대로 잘 해 가자"고 했다. 맨 나중에 정동영(鄭東泳) 의원의 발언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정 의원은 "세상 여론이 '동교동계가 대통령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한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시절 김현철(金賢哲)씨와 같은 존재가 권노갑 의원이다. 권 의원과 그 계파는 일선에서 후퇴해야 한다"는 직선적 발언을 했다. 대통령께서는 눈을 감은 채 다 들은 뒤 "노벨상 수상식에 다녀온 후 충분한 의견을 들어 대책을 세우겠다"고 한 뒤 자리를 뜨셨다.
그 이후 청와대와 교감 끝에 나와 권 의원이 사임하고 뒤를 이어 김옥두(金玉斗) 총장도 사퇴했다. 김 대통령은 12월 20일 청와대에서 조찬을 하며 나의 당 대표직 수행을 치하하고 "서 대표가 남북관계 적임자인줄 안다"하시면서 한적 총재를 맡도록 추천하겠다고 했다. 26일 나는 김중권 신임 대표와 이취임식을 갖고 민주당을 떠났으며 의원직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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