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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비운 꼬리표 떼고 지도자로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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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비운 꼬리표 떼고 지도자로 명예회복"

입력
2004.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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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대 축구감독 김종부"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팀이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대학 8강까지는 끌어 올리겠습니다."

4일 전남 광양의 전국대학선수권대회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김종부(40) 동의대감독은 83년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의 동료이자 고려대 동기인 신연호 감독에 대한 부러움을 안고 부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연호 감독의 호남대는 이미 3차례 우승에 이어 금년 춘계연맹전 준우승까지 차지하고 이번대회 16강에서 고려대에 아깝게 0-1로 진 대학 신흥강호.

대신 김감독은 화려한 고교 지도자 경력을 갖고 있다. 96년 서정원 등을 배출한 거제고 감독에 취임, 다음해 협회장기 우승을 시작으로 우승 1회 준우승 3회 등 8강 내에서 맴도는 순탄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동의대 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직접 팀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옮긴 게 2년 전이다.

전통의 명문대학이 즐비해 어쩔 수 없이 스카우트전에서 밀리고, 대학선수를 다듬고 키우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지만 그래도 더 높은 곳에 도전하고, 언젠가는 프로팀 감독을 맡아 프로선수로서 구겨진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에서 대포알 같은 슛을 날리던 김종부는 누가 보나 한국축구의 희망이었다. 182㎝ 76㎏에 힘이 넘치는 드리블과 폭발적인 슛으로 '제2의 차범근' '초대형 스트라이커' '폭격기'등 온갖 찬사를 들었고, 멕시코에서 돌아 온 후 그 해 LA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에서는 6경기 5골로 최다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그가 이름 값을 한 것은 3년 만에 다시 멕시코에서 열린 86월드컵이 마지막이었다.

불가리아와의 2차전 후반에 기용된 김종부는 패색이 짙던 후반 26분 조광래의 헤딩패스를 가슴으로 트래핑 한 후 오른발 슛, 1-1 동점골을 뽑았다. 1차전 박창선의 골에 이어 월드컵 2번째이자 한국에 첫 월드컵 승점(1점)을 안기는 의미 있는 골이었다.

하지만 프로선수 김종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95년 은퇴하기까지 8년간의 프로성적은 고작 81경기 출장에 6골, 8어시스트. 90년에 프로리그 개막골을 포함해 초반 5골을 터뜨리며 반짝하다가 무릎과 발목 부상이 재발되며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김종부 재기한다'라는 기사가 수없이 나왔지만 끝내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그는 한국 스포츠사상 최대 스카우트 파문의 주인공이었다. 고려대 3학년때인 85년말부터 터진 스카우트 분쟁은 계약금으로 사상 최고액인 1억5,000만원을 제시하고 학교의 지원을 확보한 현대와 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우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 속에 '현대와의 가계약-대우로 급선회― 대우등록에 반발한 현대의 팀 해체 선언―고려대 축구부로부터의 제명' 등을 거쳐 결국 88년 1월 제3의 팀인 포철에 입단하는 것으로 2년여 만에 마무리 됐다.

하지만 본인은 1년 반의 훈련공백과 심리적 고통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기량의 퇴보를 보여 90년 대우, 93년 일화, 95년 다시 대우로 트레이드 되는 방랑을 겪어야 했다. "당시 주위의 유혹과 힘을 뿌리치기에는 너무 어렸고 사회를 몰랐다"는 김종부는 한편으로 재벌싸움의 가장 큰 희생자이기도 했다.

"제자중 대표적 선수라면 거제고에서 키운 현 월드컵대표팀 GK 김용대(부산 아이콘스)와 올림픽팀 GK 박동석(서울 LG)이죠." 힘과 슈팅력을 주무기로 한 대형 공격수 출신 김종부의 제자 중에는 두 대표팀 수문장 이외에도 뛰어난 수비선수가 많은 게 의외이다. "요즘 축구는 개인 기술과 전술의 싸움이죠. 또 공격보다는 수비가 우선이고요. 한국축구가 그 동안 월드컵등에서 고전한 것도 공격이 약해서가 아니라 수비 때문이었어요."

그는 또 자신을 둘러싼 스카우트 분쟁으로 신인선발 제도가 드래프트제로 바뀌었다가 2년전 자유계약으로 환원된 데 대해 "제도가 나쁜 게 아니었잖아요. 부작용은 있지만 그래도 선수들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 주고 한국축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자유계약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1983년 6월11일/청소년축구 세계4강… '붉은 악마' 애칭 얻어

축구의 열기는 날이 갈수록 고조돼 오일달러의 중동국가들이 막대한 투자를 시작하고, 기존 축구 강호들 역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적으로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77년에 창설돼 2년마다 열리는 청소년대회도 '미니월드컵'으로 불리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국가대표 감독에게 청소년까지 맡길 정도.

2, 3회때 연속 본선에 진출했으나 8강 진출에 실패했던 한국은 4회때는 일찌감치 아시아 동부예선에서 중국과 북한에 져 멕시코 본선행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북한이 82년 아시안게임의 난동으로 2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됨에 따라 아시아 최종예선에 대리 출전하는 행운을 안고 마침내 본선 티켓까지 획득하게 된 것.

기사회생한 박종환 감독의 대표팀은 산소가 부족한 멕시코 고원의 경기에 대비, 마스크를 착용하고 훈련하는 등 서울에서부터 치밀한 준비와 각오를 보였다.

1차전은 우세한 경기에도 불구, 스코틀랜드에 0-2로 완패. 그러나 홈팀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는 신연호가 종료 1분전 역전 결승골을 터뜨려 2-1로 이기며 국민을 열광시키기 시작했다.

호주와의 A조 예선 마지막 경기 역시 김종건 김종부의 골로 2-1로 승리하며 8강에 진출. 비록 청소년대회이기는 하지만 세계 8강 진출은 한국축구 사상 처음 있는 쾌거였다.

준준결승 상대는 우루과이. 종전 한국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정밀한 쇼트패스와 팀워크로 몰아 붙이는 일명 '벌떼 축구'에 국민들의 흥분과 감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1-1로 비겨 연장전에 들어가서는 선제골을 넣었던 신연호가 다시 골을 추가, 한국은 기적 같은 4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세계 언론은 기동력과 투지를 겸비한 붉은 유니폼의 한국에게 '붉은 악마'라는 애칭을 붙였다.

그러나 브라질과의 준결승서는 김종부가 선취골을 뽑았으나 1-2로 역전패했고, 폴란드와의 3, 4위전 역시 1-2로 역전패, 아쉬움을 남겼다.

■1955년 6월13일/이기붕 첫 한국인 IOC위원 탄생

한국전쟁이 끝난 지 2년 밖에 되지 않아 세계무대에 한국스포츠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시절에 IOC(국제올림픽위원회)위원이 탄생했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IOC는 52년부터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는 이기붕(사진) 국회의장을 51차 파리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임했다. 이는 약소민족, 특히 독립시기가 오래 되지 않은 국가에 IOC위원 자리를 배정, IOC가 공정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뜻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60년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위원이 4·19 의거로 일가족 자살을 결행함으로써 64년 이상백 박사가 선임되기까지 4년간 한국에는 IOC 위원이 없었다. 그가 7년 7개월간 역임한 대한체육회장직은 8개월 공석 끝에 61년 1월 이철승(현 서울평화상 재단 이사장)이 이어 받았다.

■1958년 6월12일/국내 골프소개 60년만에 첫 대회

우리나라 첫 프로골프대회인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가 성동구 능동 현 어린이대공원 자리(당시 경기 고양군 뚝도면)의 서울골프장에서 4일간 열렸다. 그리고 그 해 9월 11일부터 같은 장소에서 한국오픈이 개최돼 프로와 아마가 모두 출전하는 오픈대회의 효시가 됐다. 양 대회는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돼 올해로 47회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의 창설은 골프가 국내에 소개된 지 60여년 만에 뿌리를 내리는 일대 사건으로, 골프장이나 골퍼가 많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프로골퍼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 골프장과 아마추어들이 적극 후원함으로써 대회가 빛을 보았다.

17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당시 42세의 연덕춘은 4라운드 합계 18오버파 306타로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2위 김복만과 무려 16타차, 3위 박명출과 23타차의 완벽한 승리였다.

서울골프장 전신인 군자리코스에서 골프를 시작해 34년 18세에 일본으로 골프유학을 떠난 연덕춘은 다음해 2월 일본 관동프로골프협회에서 자격증을 획득해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가 됐으며 41년 일본오픈에서 첫 우승(사진)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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