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 인접한 장쑤(江蘇)성 창저우(常州)시 톄번(鐵本)철강 공사 현장. 드넓은 벌판 위에 짓다 만 대형 공장이 군데군데 뼈대를 드러내 놓은 채 흉물스럽게 서 있고, 주변엔 각종 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무려 105억9,000만 위안(한화 1조5,885억원)을 들여 지난해 6월부터 한창 공사를 진행했다지만, 지금은 인부는 물론 주변을 지나는 사람조차 찾기 힘들다.톄번철강의 공장 건설 사업이 중단된 것은 지난 3월. 단일 대형 프로젝트를 22개 사업으로 나눠 불법으로 사업 허가를 얻어내고, 18만평에 달하는 농지를 불법으로 사들여 건설 용지로 전환하는 등 각종 탈·편법 사례가 무더기로 발견된 탓이었다. 현지 한 관계자의 표현대로 "고도 성장 과정에서 불문에 부쳐온 불·탈법 행위의 집합체"였다. '톄번 스캔들'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회사 간부, 은행 대출 담당자 등 10여명 이 사법처리됐고, 장쑤성 관리 8명은 해고 등 문책 조치를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불법행위에 대한 처단이었지만, 실제는 중국정부가 본격적인 경기 진정에 착수하는 신호탄이었다.
1차 표적은 지방 정부
최근 중국 국무원은 5,658곳에 달하는 각급 중국 경제개발구 중 절반 가량의 개발구 통·폐합 작업에 착수했다. 공업 용지로 전환된 토지를 다시 농지로 전환하고 있고, 신규 개발구 설립은 아예 금지하고 있다. 지방 정부의 실적주의에 제동을 걸고 '과열 투자의 온상'인 개발구를 정리함으로써 일부 업종의 심각한 과잉·중복 투자, 그리고 난개발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장쑤성 톄번철강에 대한 사업 중단 조치는 그 시범케이스였다. 능력도 되지 않는 업체에 불법적인 사업 허가를 내주고 용지 전환을 승인해 준 지방 정부 관리들에게 해고라는 초강수를 둠으로써 정부의 강력한 규제 의지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에 저장(浙江)성 등 일부 지방 정부는 정부의 지침에 맞춰 발 빠르게 "녹색(Green) 국내총생산(GDP) 개념을 도입해 관료들의 무차별적인 실적 경쟁을 지양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돈 줄을 죄서 과열을 잡는다
2일 오후 상하이 금융 중심지인 푸둥(浦東) 지구에 위치한 한 대형 주식제 상업은행(민영은행) 푸둥분행(지점). 평일임에도 예금 창구에는 많은 고객들이 들락거렸지만, 대출 창구는 꽤 한산했다.
대출 과장인 L씨는 "정부의 대출억제 조치 이후 많이 한가해진 편"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최근 기업 대출을 하려면 국가발전계획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며 "액수가 적어도 최소한 시 정부의 승인은 있어야 하는 실정"이라고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부동산, 자동차 관련 개인 대출도 이전과 비교하면 대출 행태가 180도 바뀌었다.
부동산, 건설 관련 자재, 자동차, 그리고 최근 석유화학 업종까지 중국 정부의 은행을 통한 돈 줄 죄기는 과열 조짐이 보이는 업종에 대한 사전적인 열 내리기(降溫) 조치인 동시에 부실 채권이라는 중국 경제의 장기적인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등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조치다. 은행들은 단기적인 수익에 혈안이 돼 지방 정부와 결탁해 경기 과열을 부추긴 공범이기도 하다. 산업은행 상하이지점 박동주 부지점장은 "무리한 대출 확대가 부실 채권을 양산하자, 다시 대출을 늘려 부실 채권 비율을 낮추려 하는 악순환이 계속돼 왔다"고 했다. 이런 노력에 힘 입어 한 때 25%까지 치솟았던 부실채권 비율은 최근 15%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래도 풀 곳은 푼다
상하이에서 북서쪽으로 120㎞ 가량 떨어진 장쑤성 우시(無錫)시. 시내에서 차량으로 20∼30분 정도 이동하면 올해로 정확히 개발 10년째를 맞는 면적 160㎢의 국가급 개발구 우시개발신구다. 중앙 정부가 최근 하이테크산업 지역으로 집중 육성하고 있는 곳이다. 한 달이면 15∼20곳 정도의 투자 제의가 들어온다는 이곳에서는 개발구 정리니, 과열 업종 단속이니 하는 최근의 분위기를 전혀 체감할 수 없다. 우시신구관리위원회 추앙후이(莊暉) 부국장의 설명은 이랬다. "이곳은 과열 고정자산 업체가 아니라 첨단 기술 업체들이 중심이 된 곳이다. 중앙 정부에서도 이런 업종에 대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투자 유치를 독려하는 분위기다."
최근 일련의 조치들이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해 무분별한 투자를 억제하겠다는 것이지, 경제 전반의 성장 기조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앙 정부의 조치가 "죌 곳은 죄고 풀 곳은 푸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국지적 과열 현상'에 대한 중국 당국의 대처는 '긴축'이라기 보다 '조정'이라고 보는 편이 맞아 보인다. 끊임없는 조기 금리 인상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중국 내부에서는 거시적 처방보다는 제도적, 시스템적 개혁에 중점을 둘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현재와 비슷한 과열을 경험한 1990년대 초반의 대응 방식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당시 인민은행장을 겸직하고 있던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경기에 급제동을 거는 방식을 택했다. 연간 통화 발행량과 금융기관 대출 총액을 통제하고, 신규 프로젝트는 물론 추진 중인 투자 건마저 심사와 허가를 다시 했다. 그 결과 과열의 터널을 빠져 나오는데 무려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KOTRA 상하이무역관 박한진 차장은 "지금 중앙 정부의 대처는 당시와 확실히 다르다"며 "막을 것은 막고 장려할 것은 장려해 어떻게든 경기가 급강하하거나 급상승하는 상황은 막아보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다.
상하이사회과학원 천지아하이(陳家海) 박사 역시 "특정 분야에서 중앙 정부의 지시대로 발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제재를 가하는 것일 뿐"이라며 "경제 발전을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상하이·우시·창저우=이영태기자 ytlee@hk.co.kr
협찬: 삼성전자
■ 과열의 주범 지방정부
"5억달러 이상 투자시 중앙의 승인을 받아야 하면 지방 정부는 1억 달러씩 쪼개서 승인을 내줬다. 과잉은 국가 전체의 문제일 뿐 지방 정부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장쑤(江蘇)성 한 국가급 개발구 고위 인사는 최근 몇 년간 지방 정부의 '실적주의'를 그렇게 지적했다.
일부 업종의 과열 양상은 결국 지방 정부 및 개발구가 부추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자 유치에 따른 실적 평가 제도로 일단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업종에 대해서는 불법까지도 눈을 감아주면서까지 무차별적으로 승인을 내준 결과이다. 3,000곳이 넘는 중국 철강 업체 중에서 경쟁력을 갖춘 연간 5,000만톤 이상의 생산 능력을 지닌 업체는 10여 곳에 불과하다는 것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방 정부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서라면 막대한 재정 부담까지도 감수했다.
일부 지방 정부들은 "국가 개발구에 준하는 세금 혜택을 주겠다"며 투자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15%포인트에 달하는 법인세 차액 부담은 고스란히 지방 재정의 몫이었다.
칭다오시정부 대외무역경제합작국 순헝친(孫恒勤) 부국장은 "워낙 개발구가 많이 들어서다 보니 방대한 토지에 일단 개발구 간판만 붙여 놓고 입주 기업이 거의 없는 곳도 허다한 실정"이라며 "지방 정부의 링다오(領導·지도자)들에게 '실적'이 곧 자신의 출세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OTRA 베이징무역관에 따르면 중국의 각급 경제 개발구는 2년 전 3,800곳 수준에서 올 3월말 현재 5,658곳으로 급증했다. 매년 1,000곳 가량의 개발구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는 얘기다.
/칭다오·우시=이영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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