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8일 미국측이 제시한 주한미군 감축일정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측이 7일 "2005년 말까지 주한미군 1만 2,500명 감축"이라는 안을 제시한 데 대해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이 나서 "미국측 구상일 뿐 협의가 남았다"고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협의'를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미국의 철수 일정을 연기시키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인 셈이다.권 보좌관은 이날 "미국이 제안한 감축일정을 단정적인 최종안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특히 그는 "미측이 협의 없는 결정사항으로 한국측에 통보했다고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우리의 입지와 협상력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계하기도 했다.
권 보좌관은 특히 "협의 과정에서 언급하지 못할 사항은 없다"고 밝혀 기지 이전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협상카드를 동원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여러가지 부대가 담당하는 기능 등을 검토해 우리측 안을 다시 미측에 제시해 논의하겠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우선 미2사단이 동두천·의정부로 통합되는 2006년 이후로 늦추는 방안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 용산기지의 평택·오산 이전 시점인 2007년을 최종 감축 시기로 하자는 논의도 있다. 정부는 감축규모와 관련해서도 규모보다는 육·해·공군의 어떤 부대를 감축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감군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권 보좌관은 "정부는 주한미군 재조정을 담당하는 3인위원회, 한미 현안을 총괄하는 고위급 실무대책위,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를 통해 미측 제안을 평가하고 관련 대책을 검토하고 필요하면 양국 군사당국자간 협의도 하겠다"고 밝혀 정부의 모든 협상역량을 총동원할 것임을 밝혔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 감군협상 전문가조언
주한미군 감축 통보 및 용산기지 이전 협상의 결렬 등 최근 한미관계에서 충격파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7일 향후 대미협상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 양국간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급선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다른 상태에서 지엽적인 협상을 되풀이하는 것은 선후가 뒤바뀐 것으로 불협화음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축시기와 규모
2005년까지 감군을 완료한다는 미국의 계획은 우리의 자주국방 준비태세를 앞지르는 것으로 시기조절에 협상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장사정포 등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력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의 일정대로 감축이 진행되면 실제 안보공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감축부대의 성격이나 단계적 감축을 고려해 전력공백을 최소화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미국이 일괄철수를 주장할 경우 이를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항공이나 포병 등 주요전력의 감축을 미국이 거론한다면 110억달러의 전력증강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확인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대선도 하나의 변수인 만큼 협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철기 동국대 교수는 "미국이 일정을 기습적으로 통보한 것 자체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압박 수단인 만큼 이에 휘말릴 이유는 없다"며 "11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협상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는 만큼 새 정권과 협상을 하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한미동맹 비전 준비
주한미군 감축의 결과로 연합사나 유엔사, 미8군사령부의 존폐여부 등 한미연합방위시스템을 둘러싼 논란도 제기되는 만큼 이에대한 대비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윤덕민 교수는 "유엔사 폐지는 정전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며 "감축협상에 앞서 한미 군사동맹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은 한미동맹의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미래비전에 대한 큰 그림 없이 감군협상만 기술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은 사상누각"이라며 "미일안보선언 같은 동맹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방연구원 김태우 연구원도 "미국은 감축 숫자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맹의 의지"라고 말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 美언론 반응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1만,2500명 감축에도 불구,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이 약화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애덤 이럴리 국무부 부대변인은 7일 정례 브리핑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결코 우리의 조약이나 안보 공약의 감소를 시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의 관리들도 새로운 방위 기술과 전략이 한국을 방어할 미군의 능력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한국민들의 충격적인 반응을 전하면서 한미 동맹의 변화와 한미 갈등 등에 초점을 맞췄다.
뉴욕타임스는 7일 "미국의 제안이 한국 내에서 워싱턴 당국이 오랜 동맹을 맺어온 한국에 등을 돌리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며 "한국의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노무현 정부가 반미 시각을 제어하지 않아 미 정부에게 감축을 앞당기도록 자극했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보수적 한국인들은 미국을 향해서도 북한과의 핵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카드를 버리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며 "그러나 서울의 국방부 청사 밖에서는 시위대가 이 소식을 미군 주둔 반대 집회의 기회로 삼고 있다"고 전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 한국인들 가운데 주한 미군의 감축이 노 대통령의 중도좌파 정부 출범으로 한미동맹이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인식도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발표된 의회예산국 보고서를 인용 "지지자들은 한국과 독일에서 미군을 빼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 주둔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부 동맹국 관리들과 국방 전문가들은 미군의 감소가 미국의 해외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으며 이전의 효과도 크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한, 미군감축 청문회 요구
한나라당은 8일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한 청문회 실시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덕룡 원내대표는 "주한미군 감축과 한미동맹의 현주소를 파악해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고 국민의 불안을 해소키 위해 국회 국방위와 통외통위 연석 청문회를 열고, 국회 내 '안보 및 한미동맹 관련 특위'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남경필 수석원내부대표도 "주한미군 감축으로 발생하는 안보공백 문제를 정부가 축소·은폐했는지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통해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오 사무총장은 "한미 동맹 변화로 인한 국방비와 사회적 비용 증가 문제 등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거들었다. 이강두 정책위의장은 "국가안위와 국민재산이 걸려 있는 중대 사안을 외교부 국장이 발표하다니, 정부가 그렇게 가볍게 처리해도 되느냐"며 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전 박진, 송영선 의원 등 당내 외교·안보 통들이 참석한'이라크파병 및 안보대책 특위'를 긴급 소집해 주한미군 감축 대책을 논의했다.
박진 의원은 이 자리에서 "정부의 대책 없는 자주국방론과 협상력 부재가 미군 감축을 가속화시킨 것"이라고 비난하며 정부의 투명한 설명을 촉구했다.
송영선 의원은 "국방부가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안보 공백 사태를 방기했다"고 질타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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