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 호흡해 온 한국일보의 반세기를 농축한 전시회 '한국 50년 한국일보 50년'전을 연다. 기간은 창간 기념일인 9일부터 9월 10일까지 세 달 간, 장소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본사 1층에 개관한 한국일보 갤러리다.신문 지면과 사진, 보도현장을 지킨 기자들의 모습과 각종 취재 기자재와 소품, 신문제작 기기, 주요 사업 자료, 동영상과 음성기록 등 총 1,000여 점을 전시한 162평의 공간은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등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기록한 '냉엄한 사관'의 땀과 열정으로 충만하다.
전시는 '한국일보 역사와 정신''신문, 이렇게 바뀌다' '현장의 기자들, 그 뜨거운 기록' '한국일보가 한국 사회를 바꾸다' '이 한 장의 사진' '명기획물' '저항의 정신, 그 영욕의 순간들' '국내외 100대 뉴스' '연재소설과 시사만평, 4컷 만화' '국민과 울고웃은 주요 사업' 등 다양한 섹션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은 보고 듣고 만지고 참여하는 입체 공간이며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 반세기를 반추하는 다큐멘터리이자 '신문 박물관' 이다.
전시장 설계와 기획은 갤러리 아트파크(대표 박규형)가 맡았다.
현장의 기자들, 그 뜨거운 기록
역사의 기록 뒤에는 기자가 있다. 그들은 지켜보고, 기록하고, 거기에 이름을 건다. 때로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쥐어터지고, 목숨을 바친다.
베트남전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안병찬 특파원(현 경원대 초빙교수)은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때 행방불명돼 본사의 애간장을 태웠으나 일주일만에 함락 순간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기사와 함께 나타났다. 국내 기자로는 유일한 베트남 함락 보도였다.
찌그러진 한 대의 카메라에는 사진취재 중 열차에 치어 순직한 고(故) 김문호 기자의 취재열정이 눈물과 함께 깃들어있다. 방독면과 헬멧 등 사진기자들의 중장비에선 자욱한 최루탄 냄새가 나고 함성소리가 들린다. 보도 현장이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을 엿보게 하는 '보도' 완장과 각종 출입증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진 뒷면에 찍힌 '검열' 도장과 '계엄사 000 중사'의 서명, 기사 일부가 허옇게 삭제된 신문 지면 등…. 신문 수난기의 기록은 그 자체로 치욕이고 역사이고 교훈이다.
대특종·명칼럼·명기획
권력과 재계의 각종 비리 폭로 등 한국의 정치 사회의 흐름을 바꾼 대특종 기사를 만날 수 있다. AP통신의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된 사진 등 국내외 보도전서 수상한 사진을 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누구나 무릎을 칠 만한 명기획을 엿보는 건 어떨까. 창간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칼럼 '지평선'과 만화 '블론디', 1982년 '여기자칼럼'으로 시작된 '장명수칼럼', 1986∼88년 김훈(소설가) 박래부(한국일보 논설위원) 문화부 기자가 연재한 '문학기행' 등은 한국일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기획물이다.
도전하고 개척하다
한국일보는 도전과 개척의 신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신문보다 앞서 나눔을 실천한 신문이었다.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 고지에 태극기를 꽂은 그 유명한 사진 한 장. 세계 8번째 위업을 이룬 고상돈 대원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은 한국일보의 진취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창간 때부터 한국일보는 국민의 아픔을 덜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다. 1954년 전쟁 고아의 부모찾기 사업을 시작, 1961년 1월 1일자 1면은 고아 63명의 사진으로 채웠고, 10년 간 총 4,300명의 명단을 실어 303명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1,000만 이산가족 찾기에도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1974년부터 3년 간 이산가족 명단을 실었고, 1983년 5월 KBS가 캠페인을 벌였을 때 이에 호응해 다시 호외를 발행했다. 최대 32면에 달했던 호외 행진은 1984년 1월 670호로 이어져 10만 952명이 이름을 올렸다.
1990년부터 3년 간 불우이웃과 북한, 빈국에 식량을 지원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1995년부터 이어지는 소외이웃돕기 캠페인 '함께 사는 사회, 함께 사는 세계'는 한국일보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사업들이다.
각종 최초기록 제조기
한국일보는 언론계를 선도한 각종 최초의 기록을 자랑한다. 창간해인 1954년 언론사 최초로 견습기자 공채제도를 도입했고, 1959년 최초로 1면에 시를 냈으며, 소년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이상 1960년) 주간한국(1964년) 미주한국일보 일간스포츠(이상 1969년) 등 자매지 창간은 모두 각각 최초의 소년지 경제지 주간지 해외판 스포츠지로 기록됐다.
발랄하고 창의적인 신문제작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세계에서 최초로 1999년 발행한 점자신문과, 신문기사를 전화로 듣는 서비스도 전시장에서 직접 만져보고 들을 수 있다. 2000년 1월 1일자 새 천년의 첫 호 1면을 백지로 장식한 것은 지금도 신문편집업계에서 회자된다. 그 앞에 서면 지금도'당신은 백지 위에 무엇을 채울 것입니까'라고 따져 묻는 것 같다.
한국의 문화예술을 꽃피우다
한국일보는 신문 연재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 중흥의 금자탑을 쌓았다.
1958년 파격적으로 상금 100만환을 내건 공모에서 당선된 홍성유의 '비극은 없다'는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1986∼90년 이문열의 '변경'은 5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린 역작. 박종화의 '여인천하'(1958∼9년), 최인호의 '상도'(1997∼2000년)는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2∼83년), 조정래의 '아리랑'(1990∼94년)도 한국일보에서 움텄다.
하지만 한국 소설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연재소설은 역시 황석영의 '장길산'이다. 1974년 32세의 무명작가 황석영이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 파장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황석영은 1984년까지 10년에 걸쳐 2,092회를 연재, 신문소설 사상 최장 연재기록을 남겼다. 마감을 맞추지 못하고 여관방으로 숨어버리기 일쑤인 황석영의 원고 수발은 문화부 기자들의 큰 일이었다. 이 연재소설은 초기에 운보 김기창이 삽화를 맡아 더욱 유명해졌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납 활자·銅版 시대 신문 제작 보셨나요
이번 전시회는 과거 신문제작에 쓰인 활자와 기계, 제작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통해 신문제작의 과거와 현재를 생생히 이해할 수 있는 산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먼저 전시장 입구에서는 이제는 퇴역한, 기름때 낀 윤전기가 관람객을 맞는다. 이 덩치 크고 검은 윤전기는 보물처럼 다루어진, 신문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은 노트북PC로 기사를 쓰고 컴퓨터화된 편집기로 신문을 만들지만 80년대말까지만 해도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납활자를 뽑거나 만들어 지면을 짜던 '정판 시대'였다. 전면 전산 제작은 1993년 9월 1일 시작됐다.
활자 주조기, 자모 조각기, 모노타이프, 정판대 등 기계들과, 좌우가 바뀐 모양의 납활자와 납활자로 만들어진 신문 원판 등을 유심히 살펴보면 지금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시절에 대한 흥분이 느껴진다.
이런 장비를 이용한 과거의 신문제작은 손이 많이 가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활자를 거꾸로 보는 데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문선공이 기자가 쓴 원고대로 활자를 뽑아 판을짠다. 이 위에 두꺼운 종이를 대고 롤러로 밀어 주형(鑄型) 역할을 하는 지형을 뜬 뒤, 이를 다시 찍은 동판을 윤전기에 건다. 동판은 처음 만든 원판처럼 글자의 좌우가 뒤집어진 형태이고, 여기에 잉크를 묻혀 인쇄하면 그제서야 제대로 된 신문이 된다. 이 같은 과거의 제작과정은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빔 프로젝터로 전시장에서 상영된다.
그러면 지금은 신문을 어떻게 만드는가. 사회부 기자가 새벽부터 경찰서에 나가 취재를 하는 모습부터 밤에 서울 시내 주요 지점을 순회하면서 야근을 하는 모습, 송고하는 모습, 전산편집을 하는 과정, 윤전기에서 찍혀 나와 자동포장이 되는 신문, 보급소로 배달이 되고 가정으로 가는 전 과정도 비디오에 담겼다.
전시의 마지막엔 관람객을 위한 재미난 참여 기회가 마련된다. 즉석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관람객의 사진을 당일 신문 1면 사진자리에 넣고 A4 크기로 프린트해 무료로 제공한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신문지면' 기념품이다. /김희원기자
■한국일보갤러리 새 명소로
한국일보 창간 50주년을 맞아 문을 연 한국일보갤러리는 화랑이 밀집한 인사동과 사간동 문화벨트의 가운데에 자리잡았다.
전시의 성격과 관객층이 구분되는 경향이 있는 인사동과 사간동의 화랑가를 한국일보갤러리가 이어준다. 전시 면적은 160여 평으로 인사동 일대에서 큰 갤러리에 속해 웬만한 전시회는 소화할 수 있다.
창간 기획전이 끝나면 신청을 받아 심사 후 화가들에게 대관한다. 다양한 문화행사 주최와 전통과 깊이있는 문화면 제작 등 '문화에 강한' 한국일보가 갤러리를 세움으로써 독자와 시민들에게 보다 다채로운 문화감상의 장을 제공하게 된다.
한국일보갤러리의 공간상 특징은 남쪽을 향한 외벽의 전시공간이다. 건물의 남쪽 벽 전체에 걸쳐 전시장 내벽과 유리창 사이 공간이 마련돼있어 '갤러리 속의 갤러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외벽 전시공간은 거리를 지나는 이들에게 24시간 공개되는 쇼윈도가 되기 때문에 운용하기에 따라 전시 내용을 맛보거나 별개의 기획전시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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