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8일 제주시 제주경찰서 앞 관덕정 광장. 십자형 나무틀에 묶여 언뜻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시키는 시신 하나가 전시됐다. 아마도 생전의 그를 조롱할 양이었던 듯, 경찰은 이 시신의 저고리 왼쪽 윗주머니에 숟가락 하나를 꽂아놓았다. 이 초라한 시신의 주인 이름은 이덕구였다.이덕구는 그 전해 4월3일부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제주도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의 지도자였다. 당초 인민유격대 3·1지대장의 직위로 봉기를 이끌던 그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빠져나간 뒤 봉기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4·3봉기의 마지막 유격대원이 생포된 것은 1957년 들어서고 제주도 전역이 평정된 것은 1954년이었지만, 이 사건은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관덕정 광장에 내걸린 1949년 6월8일에 일단락됐다고 할 수 있다. 1920년 북제주군 조천읍에서 태어난 이덕구는 일본 교토(京都)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고, 해방 뒤 귀향해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 입산해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진압 과정이 워낙 잔혹했고 민간인 희생자 규모가 워낙 컸던 터라, 제주 4·3사건은 그 뒤 이어진 폭압적 반공지상주의 질서 속의 그 이념적 미묘함에도 불구하고 신원(伸寃)의 계기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말 국회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을 제정해 이 사건 희생자들에게 역사의 제자리를 찾아줄 바탕을 마련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31일 제주도를 방문해 '많은 사람을 무고하게 희생시킨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