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주)헤세드는 경이로운 존재이다.1999년에 창업, 불과 5년 만에 치킨전문 패스트푸드체인 BHC, 커피와 허브 복합 카페체인 후에버(Whoever), 맥주 갤러리라는 독특한 개념의 맥주전문점체인 큐즈(Q'z) 등을 잇따라 업계 선두주자로 부상시킨 업체다. 전체 브랜드 매출 연 1,700억, 본사 매출만 300억원에 이르고 수익률이 25%를 넘는 이 알짜 중견기업의 소유자가 강성모(康聖模·42)씨다. 목 좋은 곳에 웬만한 가게나 식당 하나만 있어도 부자로 행세하는 요즘 이 정도면 준(準) 청년재벌 소리를 들어도 자연스러울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제 이름으로 된 집도 없다. 그 흔한 승용차도, 비서도, 골프채도 없다. 생활은 담백하고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자린고비'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가 매달 집에 갖다주는 돈은 스스로 책정한 봉급 500만원 남짓 뿐이다. 나머지 수익은 모두 회사와 150여명 직원들에게 아낌없이 재투자된다. 너무 쌓아두지 않고 나눠주는 바람에 주변에서 오히려 불안해 할 지경이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큰 행복을 얻는 것, 그게 강씨의 경영방식이자 삶의 철학이다.
국내외 특허인증서들과 정부로부터 받은 상장, 언론의 격찬 기사 등이 벽을 가득 메운 (주)헤세드 본사 사무실에서 강성모씨를 만났다. 그의 독특한 경영을 들었던 터라 뭔가 남다를 것 같은 풍모를 그렸으나 그는 뜻밖에도 세련된 도시풍의 미남이었다. 서울 강남 로데오거리의 외제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딱 어울릴 만한. 그는 실제로 학창시절에 오렌지족 같은 생활을 했단다. 고향 경북 군위의 촌에서 상경, 맨 손으로 국내 도급순위 10위권의 건설회사를 키워낸 아버지 덕이다. 너무 바빠 아이들을 챙길 틈이 없던 아버지는 흔히 그렇듯 미안한 마음을 돈으로 대신 표현했다. 기분 좋게 술이라도 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지갑을 열어 고교생 아들에게 수표들을 거침없이 꺼내주곤 했다. (그게 70년대였으니 웬만한 직장인들도 지갑 속에 단 몇천원이 귀했던 시절이다)
그러다 고교 2년 때인 78년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다른 부도 기업주들처럼 딴 주머니도 차지 않았던 아버지는 빚만 잔뜩 안은 채 주저앉았다. 지방으로 몸을 피해 술로 울화를 달래다 급기야 알코올 중독으로 병까지 얻었다. 가족들은 졸지에 빈곤층으로 내려 앉았고, 재수하던 형은 절로 들어가 버렸다. 집안이 그 지경이 됐으니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간신히 전문대를 나온 뒤 군 징집영장을 받아놓았는데 암담하더라구요. 학벌도, 배경도, 그렇다고 가진 장기도 없고…."
미래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그는 꼼꼼히 자신이 가진 것을 정리해봤다. 스스로의 장단점, 실력, 취미에서부터 주변의 친구, 친척들의 '활용'가치까지도. (그의 성공을 이끈 치밀한 메모와 분석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믿을 건 건강한 몸 밖에 없었다. "좋다. 앞으로 하루 3시간만 자면서 영어실력을 키우자.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내 주관대로 밀고 나가는 끈기를 익히자" 그러니 모두가 똑같아야 하는 군대에서의 어려움이야 오죽했으랴.
제대 뒤 오퍼상을 꿈꾸며 해외로 나갈 길을 모색하다 당장 생계를 위해 87년 작은 프랜차이즈 회사에 취직했다. 79년 롯데리아로부터 시작된 프랜차이즈 시장이 한창 확대되던 즈음이었다. "뭔지 모르고 들어갔는데 바쁘고 돈 잘 버는 업종이더라구요. 닭 장사나 식당하던 분들이 많았는데 저보다 특별히 뛰어나다는 생각도 안 들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독립을 목표로 본격적인 공부에 나섰다. 관련 기사와 광고, 홍보물을 모두 모아 스크랩하고 시간 날 때마다 점포들을 돌아다니며 직접 맛을 보고 운영실태를 살폈다. 브랜드의 성패 이유가 확연히 보였다.
4년 만에 회사를 나온 뒤 사업계획서로 투자자를 설득해 식품제조회사를 차렸다. "자정 넘어 집에 들어가 새벽 3∼4시에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아까워 일어나서 화장실 가고 밥 먹고 출근하기까지 10분 안에 다 해치웠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돈 버는 기계였지요." 당시 그에겐 오로지 능률과 효율성이 전부였다. "달력을 봐도 글자를 키워 잘 보이게 하든지, 여백을 넓혀 메모를 더 많이 하도록 해야지 뭣하러 쓸데없는 그림을 넣느냐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돈과 성공을 향해 눈 가리개 쓴 경주마처럼 외곬으로 질주하던 그의 삶에 뜻밖의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온 몸에 마비가 왔다. 좀 나아지면 또 무리하게 일을 하다 쓰러지는 일이 반복됐다. 투병생활은 3년이나 이어졌다. 물론 회사 일은 접었다. 어느날 의사가 물었다. "스스로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한 70∼80%?…' "천만에요. 대부분은 10%도 모른 채 삽니다." 한참 뒤에야 그 뜻을 깨달았다. "조금 더 갖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원래의 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착하고 나눠주기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자라면서 환경에 의해 덧씌워진 거지요. 만들어진 욕심과 지나친 경쟁심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됐던 겁니다."
완쾌된 뒤 99년에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10년 동안 1톤 트럭 분량에 달하도록 모은 사업관련 자료들과 화장실에서건, 잠자리에서건 떠오르는 대로 메모한 다이어리 60권 분량의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자신감은 충만했다. 그러나 사업의 목표는 달라졌다. 더 갖기 위서가 아니라 더 나눠주기 위한 경영이었다. 당장의 본사 수익보다 체인점들의 수익에 더 신경을 썼다. 체인점 계약실적이 목표인 많은 업체들과는 방향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음식과 용기, 인테리어,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로 따낸 숱한 특허가 다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해외 9개국에 지사를 개설할 만큼 사업이 성장했다.
수익은 바로 연구개발비와 직원들(이 회사의 급여는 동종업계 최고수준이다)에게 돌려졌다. 필요하면 해외로까지 직원들을 보내 교육시키고, 직원 누군가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선뜻 자금을 지원해 시도해보도록 했다. "입사 한 달이 되면 직원들에게 '비전(vision)서'를 제출토록 합니다. 어떤 목표로 어떤 삶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써내는 겁니다. 각자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고 도와주기 위해서지요." 많은 직원들이 그에게서 일을 배워 독립해 나갔다. "그럼 노하우를 배운 경쟁자만 늘리는 것 아니냐" 고 물었다. "우리 프랜차이즈 업계는 아직 멀었습니다. 실력을 가진 경쟁자들이 많아야 서로 자극을 줘 업계 전체, 나아가 국가 경쟁력이 커지는 거지요. 크게 봐선 좋은 겁니다."
강씨는 회사가 있는 경기 고양시 화정지구 내 아파트에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 출퇴근을 한다. 49평 아파트 평수를 얘기할 때도 미안한 듯 머뭇거리면서(이 정도 규모의 기업주가, 그것도 무슨 강남아파트도 아닌데) 굳이 설명을 달았다. "처남이 해외근무를 나가 대신 장모를 모시고 사는 집입니다." 내친 김에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수익으로만 따지면 최고급 벤츠라도 굴릴 수 있지요. 그런데 필요가 없어요. 일로 만나는 사람들은 저를 다 아니까 과시할 필요도 없고. 업무상 바쁜 임원들에겐 좋은 차가 필요하지요. 비서요? 회사 들어와 차 심부름 따위의 잡일만 해선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다들 그 시간에 자기 삶에 보탬이 될 일을 배워야지요."
그는 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웰빙 열풍이 불고있는 미국에 동양의 정신세계와 우리 전통식생활을 접목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체인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맥도날드 같은 세계적 프랜차이즈 기업들과 한번 경쟁해보고 싶은 게 그의 사업적 꿈이라고 했다. "저는 돈 모았다가 이 다음 죽을 때 가서야 사회에 한꺼번에 거액을 환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자식에게 대물림하지도 않을 거구요. 막연한 앞날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을 키우는데 모두 쓸 작정입니다."
강성모씨는 처음 '나누는 경영'을 마음 먹었을 때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니에요. 베풀 수록 오히려 더 얻어지고 강해지는 겁니다. 저로 인해 다른 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게 진짜 행복이더라구요."
본인의 소신이야 그렇다 해도 아내는 어떨까. "전적으로 제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러니 아내를 만난 게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지요. 아이한테 신발도 한 켤레만 사줍니다. '그래도 두 켤레는 돼야 갈아 신기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빨면 금방 말라서 바로 신을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저보다 더 하지요."
찌는 듯 더운 날이었으나 그의 맑은 웃음이 가슴 속을 청량하게 훑고 지나갔다.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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