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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역사를 어떻게 쓰는가/폴 벤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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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역사를 어떻게 쓰는가/폴 벤느 지음

입력
2004.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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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어떻게 쓰는가폴 벤느 지음·이상길, 김현경 옮김

새물결 발행·2만7,000원

일본의 교과서 왜곡으로 뜨거웠던 역사 논쟁이 1,500년도 더 지난 고구려사로 '전선'을 확대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엄연히 현재의 문제다. 역사학회가 최근 '세계화시대의 역사 분쟁'을 주제로 역사학대회를 연 것이나, 철학연구회가 12일 성균관대에서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갖는 것은 이런 사정을 십분 반영한다. 역사인식론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최근 나온 존 루이스 개디스 예일대 석좌교수의 '역사의 풍경: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에코리브르 발행)와 이영호 한양대 교수의 '역사, 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책세상 발행)는 공히 '역사에 진실이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고대 로마사 전공인 프랑스 석학 폴 벤느의 생각은 다르다. 역사 연구에서 통계나 계량화 또는 구조를 앞세운 1970년대 아날학파에 대한 정면 공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에서 그는 '역사학은 과학이 아니며 과학으로부터 대단하게 기대할 것이 없다. 역사학은 설명하지 않으며, 방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역사학은 무엇인가? '투키디데스로부터 베버나 블로크에 이르는 역사가들이 일단 자료로부터 빠져나와 종합을 시도하면서 실제로 했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역사가들은 인간이 그 주역을 맡고 있는 진실한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역사는 허구가 아닌 소설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임무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특정한 줄거리 속에서 이해시키고 또 이야기하는 데 있다고 그는 말한다.

벤느가 '역사는 실체가 아니다'라고 할 때의 의미는 텍스트 활동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이며 총체적인 역사가 없다는 뜻이다. 역사는 텍스트 속의 이야기로만 존재한다. 그것이 소설과 다른 점은 역사는 '그럴듯한 사실들이나 그럴듯하지도 않은 사실들이 아닌, 진짜 사실들의 이야기'라는 점 뿐이다. 그래서 벤느는 역사가를 제한된 자료를 통해 알려진 결과로부터 가설적인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 텍스트의 구멍을 메우는 사람이라고 본다. 부실한 자료 때문에 역사가는 추론을 동원할 수밖에 없고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학은 역사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하고 명료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벤느는 그 과정이 역사의 동력이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의 창조적인 역할도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의 변화 과정을 최대한 적절하게 포착하면서 그것을 일정한 종으로 분류해내고, 역사 텍스트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을 끊임없이 확충하고 갱신하는 데 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합리적 개인행위자를 기본 단위로 삼을 것을 권했다.

이 책은 1971년 초판이 출간되면서 프랑스 역사학계를 대단히 불편하게 만든 것은 물론 찬반을 떠나 역사인식론이나 방법론을 다룬 논문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책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해부학적 구조와 지배적 원인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자체에 고유한 법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역사에서 실체와 원리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과학'이라는 방법론에 기댄 역사학은 적잖은 매력과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벤느는 몇 차례 개정을 통해 초판의 날카로운 주장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고 한다. 1996년 판으로 번역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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