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초여름이면 동네 어귀 가게들은 '팥빙수'라는 글을 크게 써붙이고 골목에서 뛰놀던 아이들을 유혹했다. 엄마를 졸라 얻어낸 코묻은 돈으로 팥빙수를 시켜놓고 기다리던 짧디짧은 순간에 입안에 감돌던 침이란….빙수기에서 '드르륵 드르륵' 얼음이 갈리는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달콤하고 행복하다. 또 입 안에 감도는 팥의 포근한 맛과 곱게 갈린 얼음의 차가운 냉기가 교차되는 그 느낌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옛날 팥빙수 팔던 집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현대식 인테리어의 패스트푸드점이나 베이커리, 레스토랑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젤리나 과일로 치장한 팥빙수의 크기나 색깔도 한결 커지고 화려해졌다. 그러나 맛은 옛날 맛이 아니다. 전통 팥빙수 맛을 찾아 보기 힘든 요즘,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 옛날 그대로의 팥빙수 맛을 고집하는 곳이 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점 5층에 있는 팥빙수 전문점 '밀탑'(02-547-6800)이다. 1985년 백화점이 오픈할 때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사시사철 변함없이 손님이 이어진다. 단팥죽, 파르페 등도 팔지만 손님 10명중 9명은 팥빙수를 찾는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길래 팥빙수 한 메뉴만으로도 전문점이 될 수 있을까? 안주인 김경이씨가 팥빙수 맛의 비밀을 털어놨다.
팥 삶는 기술, 순간 포착
팥빙수에 들어가는 재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팥이다. 팥이 얼마나 적당하게 삶아졌는지가 팥빙수 맛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탑에는 주방에 팥만 전문적으로 삶는 조리사가 따로 있다. 문을 열 때부터 20년간 팥을 삶는 일만 해온 70대 할머니. 팥 속이 터질 듯 말 듯 적절하게 삶는 것이 노하우. 덜 삶으면 팥 속이 덜 퍼지고, 과도하게 삶으면 팥 속이 껍질에서 떨어져 나와 따로 논다. 너댓시간을 삶는데 팥이 살짝 터질 듯 말 듯 순간 포착을 하는 것은 아무나 따라 하기 힘들다.
주인 김씨는 "팥의 크기나 질에 따라 틀리기 때문에 잘 삶는 공식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좋은 팥을 고르는 것은 필수다. 일부 중국산은 크기는 큰데 잘 익지도 않고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눈송이처럼 보드라운 얼음
다음은 얼음. 얼음 입자를 입에 넣고 얼음 조각이 씹히면 일단 실패작이다. 밀탑 팥빙수의 얼음은 얼마나 부드럽게 갈렸는지 한 입 넣으면 보드라운 눈송이처럼 녹아 내린다. 노하우는 얼리는 강도, 어느 온도에서 얼음을 얼리고 살짝 녹이느냐에 따라 입자의 크기와 질감이 달라진다고.
떨어지지 않는 딸기 시럽
팥빙수의 3대 재료라면 팥과 얼음, 그리고 시럽이다. 밀탑에는 1년 내내 딸기 시럽이 떨어지지 않는다. 딸기 제철에 신선한 딸기들을 냉동 보관, 갈아서 시럽으로 사용한다. 생딸기를 급속 냉동해야만 신선도가 유지된다. 딸기가 나지 않는 철에도 딸기 내음을 맡을 수 있다. 우유 또한 독특하게 부드러운 맛이 난다. 우유에 연유를 적당하게 섞은 때문이다.
재료는 더도말고 덜도 말고
밀탑의 모든 팥빙수에는 떡 2점이 올라간다. 하얀듯 노르스름한 빛깔의 찰떡이다. 매일 아침 방앗간에서 직접 뽑아오는 떡이라 말랑말랑하면서도 찰지다. 과일 빙수에 얹어지는 과일들도 모두 당일 아침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사가지고 온 것들이다. 딸기 키위 바나나 수박 등 제일 신선한 것들만 골라온다. 통조림을 따서 얹은 과일하고는 맛의 차원이 다르다. 당연히 색소는 사용하지 않고, 사용할 필요도 없다.
요즘 팥빙수를 시키면 흔히 젤리가 얹혀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것도 'No'다. 하다 못해 장식용 야채 하나도 더해지지 않는다. "왜 팥빙수에 먹지도 않을 걸 넣는지 이해 못하겠다"는 것이 주인 김씨의생각. 그래서 밀탑에서 팥빙수를 남기는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다. 더 달라는 사람은 있어도…. 한그릇 5,000원.
전통 팥빙수=웰빙 팥빙수
"지금 돌이켜 보니 모두 웰빙 팥빙수였어요." 신선한 재료로 정성을 들이는 옛날 팥빙수 만들던 방식 그대로 하는 것이 최고의 팥빙수를 만드는 비결이다. 인공 시럽이나 화학첨가제, 인스턴트 젤리 같은 것이 들어갈 이유도 없다.
그래서 이 집 팥빙수 맛은 20년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만드는 방식도, 일하는 사람도, 그릇도 처음 그대로다. "팥빙수 본연의 순수한 맛을 내는 것 뿐이지요!" 주인 김씨의 얘기다.
/글 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
● 팥빙수로 이름난 집
에땅끌레르 (02)547-5574 청담동 갤러리아 명품관 건너편
녹차 빙수로 유명한 곳. 찻 잎을 말린 '말차'를 질 좋은 것만 특별 주문해 녹차 맛을 낸다. 연유와 적당히 배합, 맛이 깔끔하다. 1만3,000원.
카페마지아 (02)515-6545 청담동 구찌 매장 뒷골목
우유에 말차 가루를 희석시켜 만든 녹차시럽으로 차 향을 낸다. 팥 위에 아이스크림 한 조각을 얹어 맛을 더했다. 녹차빙수 1만3,000원. 팥빙수는 1만1,000원.
실크스파이스 (02)2005-1007 역삼동 LG강남타워 지하
수박과즙으로 얼린 얼음에 열대 과일을 통째로 놓은 100% 과일 빙수. 1만5,000원으로 비싸지만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만큼 크다.
후르츠팝 (02)417-2914 현대백화점 목동점
딸기 키위 메론 등 대중적인 과일 빙수를 맛볼 수 있다. 식물성 휘핑크림을 사용하며 과일이 푸짐하게 들어간다. 3,500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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