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6월4일 아르헨티나에서 통일장교단(GOU)이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장교단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48세의 육군대령 후안 도밍고 페론은 쿠데타 이후 노동부 장관을 거쳐 부통령이 되었고,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최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포퓰리즘의 전형적 예로 흔히 거론되는 페론주의(페로니스모)가 처음 날개를 펼치는 순간이었다.페론주의는 노동운동과 파시즘을 결합한 기괴한 독재이념이었다. 페론 정권을 떠받치던 세력은 성직자, 군부, 좌파 정당, 노동조합, 극우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페론주의를 이루는 요소들은 가톨리시즘, 친노동자주의, 반미주의, 국유화, 인권 제한 같은 것이었다. 페론이 집권한 1946년부터 그가 군부쿠데타로 물러난 1955년까지 도시노동자 임금은 47% 인상됐고,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은 크게 줄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흔히 불렸던 아내 에바에 대한 전국민적 사랑은 페론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페론은 아내가 죽은 뒤 실의에 빠졌다. 그는 이혼과 매춘의 합법화 조치로 교회와 불화를 빚기 시작했고, 경제 상황까지 나빠지자 군부로부터도 버림받았다.
페론은 긴 망명 생활 끝에 1973년 선거에 출마해, 죽은 아내의 후광을 업고 다시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는 열 달 만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부통령이었던 그의 세 번째 아내 이사벨이 페론의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그녀 역시 21개월 만에 군인들에게 쫓겨났다. 그 뒤 이어진 군부정권의 '더러운 전쟁' 기간에 페론주의자들 역시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 민정 이양 이후인 1989년 선거에서 페론당(정의당)의 메넴이 승리해 90년대 내내 집권했다. 페론주의자 메넴이 집권 기간 동안 친미 시장지상주의 경제 정책을 폈던 터라, 오늘날 페론주의라는 말은 더욱 모호해졌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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