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10> 부산대 신경철 교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10> 부산대 신경철 교수

입력
2004.06.04 00:00
0 0

가야사가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가야사는 한국사인 동시에 당시 한반도 주변의 다양한 인적 교류를 알리는 국제사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가야의 성립과 전개, 문화를 알리는 문헌 사료가 빈약한 데다 일부 고고학적 성과를 보탠 경우도 체계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야는 과연 통념대로 낙동강 하류에 흩어진 성읍(城邑)국가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집단체로 이행한 것일까. 20여 년을 가야 유물 발굴에 매달려 온 신경철(申敬澈)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는 북방 유목민의 집단적 이주가 정치집단체로서의 가야의 성립을 가져왔다고 밝힌다.

―가야사 규명에서 고고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가야사를 밝혀 줄 문헌 사료는 극히 제한돼 있다. 국내 문헌은 '532년 금관가야 신라 투항, 562년 대가야 멸망' 등 일부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중국측 사료도 가장 중요한 시기인 3세기말∼4세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 고고학적 방법이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다."

―김해 대성동 고분 발굴을 주도했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나.

"운이 좋았다. 1980년대에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 발굴·조사에 참가했고 91년에는 대성동 고분군 조사를 주도할 수 있었다. 동래 지역을 관할한 지배자들의 무덤인 복천동 고분은 5세기대의 유물이어서 4세기 이전 상황을 잘 알 수 없었는데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인 대성동 고분을 조사한 결과 가야 문화의 본질이 북방 계통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순장(殉葬)의 풍습을 확인한 것이 대표적 성과였다."

―당시 순장의 풍습을 가진 한반도 주변의 세력이라면.

"순장은 부여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의 습속인데 고구려·백제 고분에서는 확인되지 않았고 신라에서는 가야의 영향으로 4세기 중엽 이후에나 나타났다. 문화 전파가 아니라 북방 유목민의 직접적 이동의 결과임을 말해 준다. 문헌 기록을 실마리로 부여계의 이동이 정치적 집단체로서의 가야 성립을 가져 왔다고 본다."

―그런 추정의 근거는.

"중국의 '진서'(晉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285년에 부여(북부여)가 모용씨 선비족의 공격을 받아 주력이 함경도 북쪽 해안지역인 옥저(沃沮)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 의려(衣慮)는 자살하고 동생은 나중에 부여로 돌아가 명맥을 이었지만 옥저로 갔다는 부여 주력 집단은 행방이 묘연하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북방 유목민의 남하로 유럽의 게르만민족 대이동기 못지않은 대혼란을 겪었고, 그 때문에 중국측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원래 중국 지린(吉林)성을 중심으로 한 대평원에 살던 종족인 부여계가 좁은 해안지역인 옥저에서 살기 어려웠을 것이고, 옥저의 항해술을 이용해 남하해 김해평야로 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순장 이외의 다른 고고학적 증거가 있나.

"우선 도질(陶質)토기를 들 수 있다. 1,200도 전후의 온도로 구워진 단단한 토기로 700∼800도에서 구운 직전의 와질(瓦質)토기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도질토기는 3세기말 김해·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해 영남 각지로 파급됐음이 밝혀졌다. 최초의 도질토기는 반드시 양이부호(兩耳附壺) 형태로 나오거나, 양이부호와 함께 등장해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분명해졌는데 양이부호는 중국 북방 특유의 토기이다. 또 북방 유목민족 특유의 청동솥인 '오르도스형 동복(銅 )'이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고분에서 3점 발견됐다. 영남 지역의 목곽묘(木槨墓) 형식이 3세기말에 이르러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크게 달라지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한편 3세기말 북방 문물, 습속의 등장을 시작으로 가야 지역에서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가 다량 출토됐으며 특히 마구의 원류는 중국 동북지방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 자료를 근거로 가야의 모습을 새로 그린다면.

"김해 대성동 고분 세력과 동래 복천동 고분 세력의 연합에 의한 지배층 교체로 가야가 성립됐으며 유물로 보아 대성동 고분 세력이 우위에 있었다. 그 연합체가 부여의 국가, 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옮긴 강력한 집단이었다고 볼 때 흔히 6가야니, 5가야니 해서 처음부터 분열된 상태에서 출발해 그렇게 멸망했다는 식의 이미지는 크게 수정돼야 한다. 가야는 처음부터 강력한 국가 시스템과 전차군단 등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과 같은 맥락 아닌가.

"부여의 남하와 가야 지배층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에가미는 부여에서 마한 지역을 거쳐 김해에 이르는 루트를 상정했지만 나는 동해안 루트를 이용했다고 보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기마민족설'은 애초에 '천황가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일제의 황국사관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국내에서는 가야를 거쳐 일본 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이 에너지를 축적해 다시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제2의 임나일본부설'이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복천동 고분 발굴 당시만 해도 북방 세력의 이동 증거를 찾을 수 없어 비판적 입장을 취했으나 대성동 고분에서 순장 풍습을 확인하고는 재검토의 필요성을 느꼈다."

―가야와 왜(倭)의 관계는 어떠했나.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 김해 쪽에서 북방계 유물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3세기말 '하지키'(土師器)라는 일본 토기가 김해와 부산에서 많이 나왔다. 무역 대상이 될 만한 도자기 등의 귀중품이 아닌 일상생활용구라는 점에서 많은 왜인들이 가야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배층 교체기였던 가야에서 대성동 고분군 축조 등 대토목 사업을 위해 철을 주는 대신 일본 열도에서 노동력을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가야에 들어온 왜인들은 토목사업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 열도로 돌아가지 않고 가야에 주저앉아 가야 주민으로 통합됐다. 또 가야 토기에서 나와 일본화한 '스에키'(須惠器)가 5세기 후반의 가야 유적에서 산발적으로 나와 당시까지 가야와 왜의 밀접한 관계가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다만 5세기 초에 가야 토기가 일본 열도의 분위기를 바꿀 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 데 비하면 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진다."

―5세기 초에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얘기되는데.

"5세기 초에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가 돌연 중단된다. 다른 가야지역에서는 6세기 중엽까지 지배자들의 묘가 만들어진 데 비추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어디로 사라진 큰 사건이다. 대성동 고분의 주인들을 맹주로 강력한 집단을 형성했던 가야 연맹이 이때부터 해체돼 적어도 3세력으로 분열되는 등 한반도 남부의 세력재편이 일어난다. 동시에 일본 열도가 정치적 격변에 휘말린다. 금관가야 주력이 조직적으로 일본 열도에 건너갔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의 중심 세력이라면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의 노르만 왕조가 프랑스 노르만디 지역을 유지했듯 고향에 일정한 근거지를 가질 수 있지 않았나.

"고고학자는 그런 섣부른 추정에 매달릴 수 없다. 일제의 침략사관, 제국주의사관의 근저가 임나일본부설이었고 지금도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런 우려는 현재의 민족 중심 시각을 무리하게 과거에 들이대기 때문 아닌가.

"물론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네 것, 내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진 않다. 또 당시의 동북아 질서가 오늘날의 감각과는 전혀 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중국, 한국, 일본이라는 식이 아니라 중국 북방과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북방축과 백제, 가야, 왜를 잇는 남방축으로 대립했다. 가야에는 부여 일파와 토착세력 뿐만 아니라 왜계 주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중·고교 역사교과서가 임나일본부란 말을 사용하진 않지만 '가야의 철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내용을 넣는 등 일본의 역사왜곡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황영식 편집위원 yshwang@hk.co.kr

● 약 력

1950년 부산, 54세

부산대 사학과

일본 쓰쿠바(筑波)대 고고학 박사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경성대 사학과 조교수, 부교수

경성대 박물관장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초빙교수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 겸 박물관장

'김해 대성동 고분군' '동래 복천동 고분군' 등 발굴·조사보고서

■ 가야·가라·임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만한 고려 시대 이전의 금석문과 문헌에서 지명·국명으로 가야를 가리키는 한자 표기로는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伽羅, 迦羅, 柯羅), 가락(駕洛, 迦落) 등이 다양하게 나온다.

홍익대 김태식(金泰植) 교수의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푸른역사 간)에 따르면 이 가운데 가라(加羅)가 사료에는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지만 용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서기'에서는 주로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고 있어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는 부적합하다. 또 가야를 '伽耶, 伽倻'로 표기한 것은 고려 시대 이후 불교와 관련된 표기법일 것으로 추정, '加耶'가 가장 타당한 표기라고 보았다.

한편 국내 사료에는 세 번 나오지만 '일본서기'에만 215번이나 등장하는 '임나'(任那·일본음 미마나)의 어원을 밝히는 정설은 없다. 다만 김 교수는 변진(弁辰) 12소국의 하나인 '미오야마'(彌烏耶馬)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보면서 처음 '임나'는 창원, '가라'는 김해를 가리켰지만 후대에는 '임나'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역 중심의 가야연맹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서기'가 5∼6세기 대가야 주도의 후기 가야연맹에 대해서도 굳이 '임나'를 쓴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