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11시51분 인천국제공항 A입국장. 훤칠한 키의 한 청년이 목에 메달을 주렁주렁 달고, 손에는 커다란 은빛 트로피를 들고 입국장을 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수많은 마중객 때문에 수줍은 탓일까. 모스크바에서 열린 근대5종 세계선수권에서 아시아선수론 첫 개인전 은메달과 릴레이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근대5종 22년 역사에 새장을 연 이춘헌(24)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충성! 이병 이춘헌!" 한국 근대5종의 신새벽을 알린 이제 막 떠오르는 스타지만 그는 군대에선 입대 5개월차인 이병일 뿐이다. 절도 있는 경례동작에서 신병티가 묻어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2남4녀 중 막둥이의 금의환향(錦衣還鄕)에 어머니 이현례(60)씨는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올해가 환갑인디 올매나 조은지 몰라라. 없는 살림에 잘 먹이지도 못 했는디…" 당뇨 때문에 입원했던 아버지 이병옥(61)씨도 아들의 낭보에 "다 나았다"며 병상을 박차고 머나먼 남도에서 아들을 맞으러 왔다.
어릴 땐 지지리도 약골이었다. 바로 위 형과 10년 터울이라 엄마가 새참 싸 들고 논일 나가면 졸졸 따라다니는 착한 아들이었다. 고사리 손으로 농사일 돕겠다고 두 손 걷어 부칠 땐 차라리 안쓰러웠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 갑자기 운동을 한다고 합디다." 어머니는 아들이 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공부해도 모자란 판에 무신 놈의 운동"하곤 호통을 쳤다. 그것도 금시초문인 '근대5종'이라니 혀를 끌끌 찰 수밖에.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덥석 광주체육중학 입학을 허(許)하고 말았다.
이춘헌은 "비인기종목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인기종목에서 그만그만한 실력으로 묻히는 것보다 오히려 열심히 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입문동기를 밝혔다. 더구나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운동이 근대5종이라니…
그렇다고 처음부터 승마 펜싱 사격 수영 육상 등 모든 종목을 시작한건 아니었다. 일단 육상과 수영 등 근대2종부터 시작했다. 학년이 오를 때마다 한 종목씩 더해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엔 승마만 빼고 4종목을 하는 '근대4종 선수'로 성장했다.
그만두고 싶었던 날도 많았다. 어머니는 "운동하느라 일주일에 딱 한번 오는데 잠자리에서도 '끙끙' 앓았다"고 했다. 본인도 "수영실력이 늘지 않아 애를 먹었다"며 "학창시절엔 잘 하는 축에도 끼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쉬지 않고 운동했다. 한국체대에 입학해 승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대학3학년이던 2001년 문화관광부장관기 전국근대5종선수권에서 개인·단체 2관왕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난해엔 아시아선수권 2관왕(개인·단체)을 차지하며 한국 근대5종의 희망으로 떠올랐고 올해 역시 아시아선수권 개인 2위(단체 1위)를 차지해 아시아에 두 장 배정된 아테네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세계무대는 아직 높은 태산이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에 첫 출전한 이춘헌은 24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1년 만에 같은 대회에서 그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에 첫 은메달을 안겼다.
"기적 같은 일"이라고 수근대지만 지난해 말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 새벽5시30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모든 종목을 반복해서 훈련한 땀의 결실임을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체격조건은 유럽의 강호와 비슷하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며 "쉬지 않고 꾸준히 운동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구 1,500여명, 등록 선수 300명, 그 중 대회를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고작 30명인 게 한국 근대5종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춘헌은 자신의 수상이 "묵묵히 운동(근대5종)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산한 세월을 버텨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고마운 사람들도 많았다. "영광을 안겨준 하나님과 낳아주신 부모님, 꿈을 심어주신 중·고교 은사님, 가르쳐준 코치와 감독님, 그리고 모든 근대5종 식구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부족한 수영과 펜싱을 보완해 아테네에선 꼭 메달을 따겠습니다."신새벽이 아테네에서 밝은 태양으로 떠오르길 기대해본다.
/인천공항=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이춘헌 프로필
●생년월일 1980년5월9일(음)
●출 생 지 전남 담양군 대전면 강의리
●가족관계 2남 4녀 중 막내
●체 격 키 184㎝, 몸무게 75㎏
●여자친구 급구
●학 력 광주체중, 광주체고, 한국체대,국군체육부대(2003년12월28일 입대)
●성 적
-2001.9 제20회 전국근대5종선수권(개인 우승)
-2003.7 2003세계근대5종선수권(개인 24위,릴레이 7위)
-2003.11 아시아선수권(개인,단체 우승)
-2004.4 아시아 선수권(개인 2위, 아테네올림픽 참가 확정, 단체 릴레이 우승)
-2004.5 2004세계근대5종선수권(개인 은메달, 릴레이 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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