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앞에서 당파를 떠나 한 목소리를 내는 정치 행태는 미 의회의 전통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이념과 노선이 확연히 다른 정당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의원들이 법안을 공동 발의하거나 외교·안보 이슈에 공동 대처하는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옛 소련의 핵이 다른 국가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민주당의 샘 넌, 공화당의 리처드 루가 두 상원의원이 발의한 넌·루가 법안은 당파를 초월한 의원 활동의 결실로 꼽힌다.
지난 주 주한미군 이라크 차출 문제 등 외교안보 현안 파악을 위해 한나라당 대표단 자격으로 워싱턴을 찾았던 박진 의원은 '초당 외교'를 꺼냈다. 지난 달 25일 미 정부 및 의회 주요 인사와 한반도 전문가들을 두루 만난 뒤 가진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그는 초당 외교의 필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17대 국회에서 앞장서 초당적 의원 외교 단체를 구성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래서였을까. 박 의원은 "2사단 차출은 주한미군 감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게 미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라크 상황 악화에 따른 결정일 뿐 주한미군 감축의 신호탄이 아니라는 미 관리의 말도 소개했다.
미 관리들이 최근 이번 결정은 미 해외주둔 미군재배치(GPR)의 일환이라는 점을 브리핑하고 있다는 반론에도 박 의원은 GPR과 주한미군 차출 논의는 차원이 다른 얘기라고 설명했다.
"야당의원 맞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외교적 경험과 식견을 갖춘 그의 역설은 17대 국회의 밝은 미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박 의원 귀국 후 서울에서 전해진 소식을 너무도 달랐다. 박 의원은 지난달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주한미군 차출 결정은 "GPR 계획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라고 규정했다.
워싱턴에서 "이번 결정이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는 백악관 관리의 대화 내용을 전하던 그의 말은 서울에서는 한미관계의 신뢰 손상에 대한 강조로 바뀌어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사이, 당에 특사 활동을 보고하는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초당 외교에 대한 그의 신선한 실험이 며칠 사이에 뒤바뀐 설명으로 빛을 바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당 밖에서나 안에서나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초당 정치의 시작이다.
/김승일 워싱턴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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