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맥추(麥秋) 무렵'이 있다. 글자 풀이 그대로 보리 가을이다. 그렇다고 이걸 정말 가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보리가 익는 시절이니까 바로 지금 이 무렵이다.어린시절 할아버지는 같은 초여름 날씨도 '맥추'와 '맥추 이후'를 구분하여 쓰셨던 던 것 같다. 맥추보다 맥량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쓰셨는데, 보리가 익을 무렵의 날씨는 봄과 여름의 한중간이면서도 또 가을처럼 서늘한 맛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어디를 가더라도 보리밭을 쉽게 볼 수가 없다. 아직 익지 않은 푸른 보리밭에 한줄기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이제 막 팬 이삭들이 서로 얼굴을 부딪치며 물결처럼 나부끼는 그 바람결의 모습을 다시 볼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가 보릿고개라고 했고, 세월이 흘러 우리 아들은 불경스럽게도 그것을 입안에서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밥이라고 부른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원주에 가면 시내로 들어가는 길옆에 제법 큰 보리밭이 있다고 한다. 이젠 내 입으로 들어오는 곡식들이 익어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고 살아야겠다. 그게 자연에 대한 인사인 것 같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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