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월드컵 대표팀 허정무86년 멕시코월드컵을 회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주장 박창선의 통쾌한 중거리골과 함께 마라도나를 걷어찬 허정무(49·현 용인축구센터 총감독)의 일명 '태권 축구'이다.
네덜란드 프로팀 아인트호벤 출신으로 85년말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본선진출을 확정시켰던 허정무의 이 수비장면은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할 만큼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정남 감독이 마라도나를 수비수인 김평석에게 맡겼다가 잘 안되자 저에게 봉쇄 임무를 넘기더군요. 후배들이 워낙 몸이 굳어 있어 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가 앞장 서서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했지만 팀이나 마라도나나 모두 한국과의 경기서 가장 부진했습니다."
전남 진도 출신에다가 상대를 맡으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때문에 '진돗개'란 별명을 얻은 그 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액션이 거칠기는 했지만 타임의 사진은 공이 없어지고 마치 내가 상대의 다리를 겨냥하고 들어간 것으로 조작돼 억울하다"며 당시의 우리 대표팀 멤버들의 개인 능력은 사상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지금과 같이 풍족한 지원아래 국제경기 경험을 많이 쌓았다면 16강은 충분히 이뤄낼 전력이었다고.
86월드컵 멤버들은 이후 한국축구의 주축을 담당해 왔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중이었던 당시 31세의 차범근은 귀국 후 프로팀 울산현대와 국가대표 감독을 거쳐 현재 수원삼성을 이끌고 있고 최순호는 포항, 조광래는 서울LG, 김종부는 동의대 감독을 맡고 있다. 조영증은 LG감독을 거쳐 현재 파주 국가대표훈련센터장이고, 박창선은 경희대, 이태호는 대전시티즌 감독을 역임했다. 김정남감독은 울산현대, 김호곤코치는 올림픽팀을 지휘중.
본인도 화려한 길을 걸어왔다. 그 해 86서울 아시안게임 우승 후 경제력이 있어야 지도자 생활을 소신껏 할 수 있다며 플라스틱 사출공장을 차려 2년간 제법 돈을 번 후 이회택 감독의 90이탈리아월드컵팀에 트레이너로 들어가고, 김호감독의 94미국월드컵팀에도 코치로 참여해 월드컵 연속 3회 출전을 이뤘다. 그리고 프로팀 포항과 전남 감독 역임 후 98년 최초의 경선을 통해 대표팀 전임 감독에 취임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목표인 8강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2승1패를 거뒀다. 2승은 이전 52년간 한국이 올림픽에서 거둔 총 승리 수와 같은 최고성적. 그러나 8강실패에 대한 비난이 그치지 않았고, 결국 2002월드컵을 향해 진군하던 중 아시안컵에서 쿠웨이트에 져 3위에 그치면서 사임, 월드컵에서는 지휘봉 대신 KBS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그는 당시의 중도탈락을 축구인생에서 가장 섭섭한 일로 꼽고 있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이천수 최태욱등 유망주를 발굴해 A매치에 기용하며 2002 월드컵을 목표로 훈련했습니다. 올림픽과 아시안컵 모두 냉정하게 보면 나쁜 성적이 아니었는데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죄인 취급하는 게 매우 억울하고 힘들었지요." 하지만 2002년 월드컵유치로 팬들의 기대가 높아진데다 공동 개최국인 일본이 아시안컵의 우승을 차지한 상황이라 여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대표팀을 물러난 후 용인 축구센터 총감독으로 새로운 인생을 열었다.
프로와 대표팀 감독을 하며 절감한 선수들의 기본기 부족에 대한 해결책을 놓고 고심하던 중 용인시와 함께 2001년 10월 축구학교를 연 것. 기술연마에 필수적인 천연잔디 3면 등 5개 면을 갖춘 구장에서는 200명이 훈련 중이며 이들로 구성된 용인의 원삼중과 백암종고는 전국대회를 석권, 곧 국가대표들이 쏟아져 나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축구계에서 가장 인연이 두터운 이회택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부름을 받고 기술위원회에 들어가 월드컵 감독 선정의 중책을 수행중이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1986년 6월2일/박창선, 아르헨 상대 '월드컵 첫 골'
태양이 작열하는 멕시코 고원의 올림픽스타디움. 32년 만에 월드컵본선에 진출한 한국이 아르헨티나와 첫 경기를 가졌다. 아르헨티나는 78년대회 챔피언이자 세계 최고의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건재한 우승후보 1순위. 역시 상대는 경기 개시 6분만에 마라도나의 프리킥을 받은 발다노가 선제골을 넣은 것을 시작으로 내리 3골을 퍼부었다.
초반부터 자신감 결여로 몸이 얼어붙은 듯 했던 한국은 승리가 확실해진 아르헨티나의 플레이가 느슨해진 사이 활기를 찾아 드디어 후반 28분 박창선의 25m 중거리슛(사진)으로 반격을 가했다. 월드컵 사상 한국이 기록한 최초의 골이었다. 그러나 승부는 되돌리지 못하고 1-3으로 종료.
한국은 불가리아와의 2차전서는 반드시 이겨야 16강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에 필사의 각오로 임했으나 전반 11분 골을 허용한 뒤 후반 26분 조광래의 패스를 받은 김종부의 터닝슛으로 1-1, 월드컵 참가 사상 첫 무승부로 승점 1점을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탈리아와의 3차전서는 최순호와 허정무가 골을 터뜨렸음에도 또다시 2-3으로 패배. 결국 한국은 1무2패로 대회를 마쳤으나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밤새 응원한 국민들로부터 찬사와 격려를 받았으며, 세계 언론으로부터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6년 5월 31일/2002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확정
한국과 일본간의 치열한 2002년 월드컵 유치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공동유치로 결론이 났다.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는 유럽축구연맹(UEFA)이 발의, 상정한 양국 공동 개최안을 확정, 월드컵이 1930년 우루과이에서 1회 대회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두 나라에서 개최토록 했다. 한국은 일본보다 2년6개월 늦은 93년 12월 유치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월드컵을 유치하면 북한에서도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FIFA에 건의하겠다"며 한반도 평화를 명분으로 본격적인 유치운동을 벌인 끝에 개가를 올린 것.
규정대로 단독개최를 일관되게 주장해 온 한국은 유럽축구연맹의 요한손회장을 비롯한 개혁파들과 손잡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활발한 로비로 일본을 추월, 표대결에서 자신감을 보였으나 개최지 결정을 하루 앞두고 세불리를 느낀 아벨란제회장이 뜻밖에도 공동개최안을 내놓아 방향이 바뀌었다. 물론 94년 5월 정몽준회장의 FIFA부회장 당선이 한국개최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던 예상을 뒤집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1992년 6월 7일/'유리턱' 김광선, 훅 한방에 주저앉아
86아시안게임 87월드컵에 이어 88서울올림픽 플라이급 금메달을 따내고 90년 5월 1억5,000만원의 사상 최고 계약금을 받으며 프로복싱으로 전향한 김광선.
160㎝가 안 되는 작은 키 때문에 '라이터 돌'이란 별명을 갖게 된 그는 프로에서도 4연속 KO를 기록하는 등 무서운 펀치를 자랑했다. 그리고 단 5승을 거둔 후 WBC 타이틀에 도전하는 행운을 잡았다.
당시 라이트 플라이급 7위이던 그는 국내 프로복싱 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홍수환을 특별 트레이너로 영입해 챔피언 움베르토 곤살레스(멕시코)를 격파할 전략을 갖추는 등 철저한 준비 끝에 서울에서 결전을 벌이게 됐다. 이열우 장정구 임정근을 꺾은 '한국복서 킬러'에 대한 복수와 함께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챔피언, 최소전적(6전·종전 문성길의 7전) 세계 챔프라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김광선은 마지막 2분을 버티지 못하고 12회 55초 만에 쓰러졌다.
11회까지 심판 2명이 2점, 1명이 1점을 김광선이 앞선 것으로 채점했으나 11회 종료 10초를 남기고 턱에 왼손 훅을 맞아 첫 다운을 뺏기고, 12회 들어 서두르다가 두 차례 더 다운을 당하고 말았다. 이어 93년 7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가 WBC IBF 통합챔피언 마이클 카바할(미국)을 상대로 두 번째 도전을 했으나 역시 턱에 강한 훅(사진)을 맞고 7회 23초 만에 KO패, '라이터 돌' 대신 '유리 턱'이란 별명을 안고 프로전적 6승(4KO)2패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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